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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힌 Aug 22. 2021

#10 맥주

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아홉 시간의 근무를 마치고 한 시간 반의 퇴근길을 거쳐 집에 도착하면 이십 여분 동안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한다. 욕실 문을 열고 나오면 일과 무더위로 지친 몸이 나른해진다. 그때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낸다. 치익- 딱! 하는 소리가 나면 맥주 캔의 입에 입맞춤한다. 머리까지 짜르르하며 온 몸이 파랗게 시원해진다. 이 순간만큼은 나는 여름을 이기고 승리를 쟁취한 금메달리스트다.





 나의 첫 음주는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이때 당시 민요를 배우던 때였는데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산공부’라 부르는 여름 합숙 훈련을 하게 되었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 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는데, 술은 언니들한테 배워야지 하며 마지막 밤에 비밀스러운 파티를 열게 되었다. 그날 처음으로 먹었던 술은 쏘맥이었다. 더웠던 여름이어서 그런지 쓴 맛보다는 시원한 맛이 더 크게 느껴졌다. 아니면 언니들이 기가 막힌 황금비율로 쏘맥을 타 준 거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여름밤 탁 트인 오두막 평상에서 검푸른 밤하늘을 보면서 반짝이던 언니들의 미소와 청량하게 울려 퍼지며 유리잔이 부딪히던 소리는 술에 대한 짧았던 첫인상을 즐겁게 만들었다.


 술에 대한 두 번째 기억은 대학생이 되고 난 후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술자리였다. 술에 취해있었기 때문인지 뜨문뜨문 생각이 나지만 강렬하게 떠오르는 건 술기운의 힘을 빌어 처음으로 남에게 생떼를 부려본 것이다. 친구들에게 자꾸 편의점을 보고선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하고, 핫도그 포장마차를 발견하고선 핫도그를 사달라고 졸랐다. 안주를 고를 때에는 친구들을 신경 쓰느라고 먹고 싶은 메뉴도 말도 못 했던 내가 술을 먹고선 투정을 부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같이 도시락을 먹어도 다른 사람의 반찬에 절대 손도 대지 않고 묵묵히 내 반찬만 먹던 내가 뭘 사달라고 졸랐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꽁꽁 숨겨두던 속마음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술이 수면 밖으로 건져줄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때 깨달았다.


 솔직하게 하는 마법의 약으로써 술을 사용하게 된 것은 아마 그 이후부터였다. 겉으로는 점잖게 있으면서 속으로는 신나게 춤추고 있는 나를 술은 마법처럼 바꿔주었다. 더 크게 깔깔거리고 웃게 되었고 말도 좀 더 재밌게 하게 되었다. 평소에 나를 막아서는 걱정이나 눈치라는 필터 없이 막 내뱉어지는 느낌이었다. 해방감에 취하고 술기운에 취했다. 술에 취하지 않고 목석 같이 앉아 있는 나보다 술에 취해 재잘대며 종종거리는 참새 같은 내가 더 좋았다. 술 취한 내가 좋아질수록 점점 더 술이라는 마법의 영약에 빠져 헤어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유혹에 빠져 나중에는 술을 먹지 않으면 너무도 인생이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우울할 때도 기쁠 때도 화가 날 때도 울고 싶을 때도 나는 술을 찾았다. 맛있는 걸 먹으면 맛있는 안주엔 맛있는 술이지 하며 마시고 영화를 보면 이게 진정한 휴식이지 하며 술을 마셨다. 그러다 보니 살은 살대로 찌고 마음은 마음대로 말라갔다. 작년 초 몸이 크게 한 번 아프고 나서야 술에 대한 경각심이 들었고,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마음이 안정되고 나서야 술에게서 조금 멀찍이 떨어지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는 술을 좋아한다. 술 얘기만 나오면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오센’에 나오는 아오이 유우처럼 표정이 더 나위 할 것 없이 해맑아진다고 하니, 나는 술을 여전히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 술을 마실 때의 해방감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과 조곤조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시는 분위기도 좋다. 술기운에 신나게 무거웠던 몸도 흔들어보고 삑사리가 나도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노래도 부를 수 있다는 점 또한 좋다.


 그러나 이제는 술을 좋아하기에는 지키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서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의 곁도 오래도록 지키고 싶고, 블랙아웃 때문에 잊어버리게 되는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도 한 톨 한 톨 간직하고 싶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순간을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사람과 추억과 미래를 위해 나는 노력해보고자 한다. 언젠가 결심이 흐트러질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당장 오늘 저녁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흥청망청 술에 취해 휘청거려 쓰러질지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날 것이다. 기나긴 도전 끝에 승리를 거머쥐게 되는 순간, 찬란한 축배를 들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바라보면서, 한 병의 투명한 이슬보단 한 잔의 황금빛 맥주로.






글 쓴 시누이 - 율힌 yulhin

그림 그린 새언니 - 전포롱 jeon polong




시누이새언니


새언니와 오빠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고,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어느덧 10주가 지나

이렇게 여름 시즌 글을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글 속에 저를 녹여내 보려고 했는데,

제 마음이, 제 생각이 당신께 잘 전해졌는지 모르겠네요.

글을 쓰는 내내 정말 어려웠지만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당신과 함께 지지배배 울 수 있어서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 시누이 율힌 올림 -


더 이상 그리고 싶은 것이 없는 갈증의 날들이 계속되어갈 때 만난 샘 같은 기회였어요.

덕분에 누구보다 뜨거운 여름을 즐길 수 있었어요.


우리에게 남은 계절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 새언니 포롱 올림 -





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가을 시즌으로 2주 뒤인 2021년 9월 5일 오전 11시에 찾아뵙겠습니다.




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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