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손끝에 겨울이 닿았다. 차갑고 단단해진 것이 마치 고드름 같았다. 내 손을 요 꼴로 만든 이 맹렬한 추위는 겨울은 이제 시작인데 엄살 부리지 말라며 나를 비웃었다. 잎도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는 탈모인 주제에 감히 손가락질하며 골려댔다. 그래 한 번 와 봐라. 마음먹고는 두툼한 패딩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는다. 짤랑이는 동전이 몇 개 만져졌다. 큼직한 놈이 서너 개는 되는 듯하다. 옳다구나. 집에 가는 길에 붕어빵이나 사 먹어야지.
나는 겨울에 태어났다. 그래서인가 겨울을 더 잘 기억한다. 산타를 기다린답시고 딸내미 줄 모자와 목도리를 손에 꼭 쥔 엄마 아빠를 밖에서 벌벌 떨게 만들었던 때도 겨울이었고, 상가 1층 호프집 아저씨랑 쫄면 사리를 떼던 일도 그곳에서 메뚜기 튀김을 먹어본 일도, 2층 새우버거집과 3층 우리 집 사이의 외부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덜덜 떨었던 기억도 모두 겨울이었다. 방학식날 교문 앞에서 만나 애지중지 키웠던 병아리와 헤어진 날 또한 그랬다. 자주 말하는 오대산의 은하수도 매번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만났다. 이렇게 그동안의 겨울을 되새김질하다 문득 깨달았다. 나의 겨울은 8살 무렵이었고 신풍동 소재의 오래된 3층 상가였다고.
우리 집은 상가 3층 전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3분의 2 정도는 아부지의 사무실 남은 3분의 1이 우리가 사는 공간이었다. 자려고 이불 두 채를 깔면 방안이 가득 찼다. 그래서 아부지 사무실도 구분만 지어놨지 우리 가족의 공간이었다. 손님 접대용 둥근 테이블 아래 키우던 강아지 브라운이 이름다운 영역표시를 했던 기억 한 조각. 사무실 한쪽에서 병아리가 있는 박스 안을 쪼그려 앉아 들여다보던 기억 한 조각. 크리스마스이브, 엄마 아빠 누울 이불까지 미리 펴놓고 오빠와 함께 무릎 세우고 앉아 산타를 기다리던 기억 한 조각. 아부지가 건네주신 미색 종이봉투를 열어보니 들어있던 달마시안 모자와 목도리를 보았던 기억 한 조각. 옥상에서 키웠던 커다란 개, 만득이의 집을 지어주던 아부지의 커다란 등을 쳐다보던 기억 한 조각. 문 앞 층계에 앉아 두 손 모아 삐약이를 안고 울던 조금 많이 슬펐던 기억 한 조각까지. 구멍 투성이인 내 유년의 추억 퍼즐에서 신풍동 집은 겨울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참 많은 부분을 차지했었다. 아니 거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려나. 오대산에 가게 된 것도 거의 이쯔음이었으니 장소만 다를 뿐이지 기억의 연장선상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층이 맨 위층이기도 하고 1층과 2층은 그냥 영업장이었기에 상가 옥상도 우리 가족이 사용했는데, 거기엔 만득이가 살고 있었다. 만득이는 잘 못 씻겨서 살짝 누랬지 하얀 털에 쫑긋하고 뾰족한 귀를 가진 큰 개였는데, 진돗개를 닮았지만 아마 그 당시 우리 집의 재정상태로 보았을 때 진돗개의 친척의 친척의 친척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 기억으로 아부지가 지인을 통해 데려왔던 만득이는 덩치가 커서 좁은 방과 사무실에서 함께 살긴 어려워 옥상에서 키웠다. 여름이 되어 태풍이 다가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아부지는 망치를 잡으셨다. 만득이가 태풍을 피할 수 있도록 몇 시간 동안 나무판자로 집을 만드셨는데, 만득이보다는 만들어진 집이, 집보다는 아부지의 어깨가 더 크게 보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밤, 만득이는 세상을 떠났다. 태풍 탓인지 번개 탓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오빠와 나는 한동안 아부지가 만득이 이름을 만득이라고 지어줘서 만득이 귀신이 데려갔다며 엉엉 울었다. (만득이 시리즈는 그 당시 최불암 시리즈와 버금갈 정도로 유명했던 시리즈였다.)
아랫집인 2층은 햄버거 가게였다.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먹은 기억은 없으나, 새우버거는 매우 맛있었다. 엄마가 사 오라고 돈을 쥐어주시면 신나서 오빠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가게 인테리어는 색채로만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빨강과 하양의 줄무늬 혹은 주황색이었다. 안 섞이고 나열된 색인지 섞인 색인지는 모르겠으나 역 근처에 있는 작은 옛날 햄버거집 더하기 롯머시기 정도의 느낌이랄까. 새우버거는 내용물이 굉장히 심플했다. 참깨 빵 위에 새우 패티 한 장 하얀색 소스 양상추 피클 양파까지~가 전부였다. 가끔 그 맛이 그리울 때가 찾아오면 나는 새우버거를 사 먹는다. 먹어보면 과거나 현재의 버거 둘 다 맛은 꽤나 비슷했는데 추억이라는 감미료가 붙어서인지 갓 튀겨서인지 2층 햄버거 가게의 새우버거는 좀 더 기름지고 바삭하고 조금은 인위적인 새우 향이 담뿍 담긴 맛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그 맛과 향이 그립다. (요리만화를 보면 꼭 어르신이 어릴 적 먹던 음식을 재현해내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그 점이 굉장히 몹시 온전하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1층은 부부가 운영하는 호프집이었는데 우리 집안과 퍽 친했다. 하교하면 바로 집으로 갈 적도 있었지만 가끔 엄마와 손을 잡고 호프집으로 향했다. 물론 엄마와 한 잔 하러 갔던 건 아니다. 내가 암만 술을 좋아해도 너무나 많이 앞서서 불법적인 조기교육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셨을 부모님도 아니셨고. 여튼간에 엄마와 함께 호프집에 가면 호프집은 술집이 아니라 사랑방이 되었다. 어른들은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과 담소를 나누셨고, 나는 아마 주스를 홀짝이며 어른들의 얘기를 들었으려나? 그 부분은 어린 나에게 재미가 없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 뚜렷이 떠오르는 건 날은 쌀쌀했고 하늘은 어스름, 나무 테이블 위 조명은 노르스름했으며, 손에 쥔 쫄면 사리도 노랬던 기억이다. 노란 쫄면은 하나씩 똑똑 떼어서 쟁반 위에 산처럼 쌓는 게 얼마나 재밌던지. 지금 생각하면 노동인데 그때 나에게는 놀이었다. 그렇게 쫄면 사리를 다 떼어내면 아저씨는 간식을 주셨는데 한 번은 피자맛이 난다면서 메뚜기 튀김을 주셨다. 튀김은 정말 피자맛이 났지만, 다시는 먹지 않았다. 그 이후로 먹을 기회도 없었을뿐더러 기회가 있더라도 지금 다시 먹고 싶진 않지만 그 시절 추억으로써 고놈은 참 맛있었다.
그날의 계절과 색채와 맛과 향으로 나는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어른들에게 1998년은 추운 겨울이었고 무미건조한 무채색이었으며 맡기 힘든 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도 8살 나의 인생 한 조각은 겨울이었다. 차갑기에 따듯함을 더 포근히 느낄 수 있는 겨울이었고, 무채색이었기에 더 눈부신 겨울의 은하수였으며, 이따금 그리워지는 시리고 깨끗한 겨울의 향기였다. 차디찬 몸속에 뜨끈함을 녹여 내리는 어묵 국물 같은, 군고구마 같은, 붕어빵 같은 그런 뭉클한 맛이었다. 우리에게 그 시절은 같은 겨울이었고, 다른 겨울이었다. 지금 이 순간, 겨울 한가운데에서 뒤돌아 나의 겨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마음이 평안해진다. 너의 겨울도 그럴 수 있기를, 별빛에 실어 마음을 올려 보내본다.
글 쓴 동생 - 율힌 yulhin
그림 그린 오빠 - 토마쓰리 Thomas Lee
안녕하세요. 율힌입니다.
수족냉증 있는 저에게 너무나도 힘든 계절, 겨울이 왔습니다.
몸은 힘들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사랑하는 계절이기에
겨울이 무척 반갑습니다.
찬 공기에 손이 얼어버린 건지 머리가 얼어버린 건지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려하니
막상 글이 잘 써지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계절이기에 더 좋은 글로 겨울에게 보답하고 싶은데
맘 먹은대로 써지지가 않더군요.
그러다보니 글을 계속 써야할까 고민이 되기도 했구요.
퍽 고통스러웠습니다.
이상은 저 멀리서 별처럼 빛나고 있는데
제 몸뚱아리는 이 도심 한가운데 주저 앉아 있으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마음쓰림을 견디며
글로 하얀 화면을 채웠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나니
결국 하나의 글을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싸질러 냈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술은 예술가의 똥이다 라고 유투브에서 주워들은 말도 생각나면서요.
어쩌면 글은 저에게 '겨울'같은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춥고 손발이 얼고 살얼음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힘든 순간들이 있어도,
눈 내린 밤, 검은 하늘에 흩뿌려진 별과 새하얗게 내린 눈을 보며
마음이 고요해지는 그 찰나가 소중하기에
겨울을 사랑하는 것처럼
저는 글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겨울은 글과 투닥거리며 사랑싸움을 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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