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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힌 Sep 12. 2021

비와 아이

 아이는 비가 좋았다.


 토독 하고 울려 퍼지는 빗소리도 좋았고, 쏴 하고 시원해지는 공기도 좋았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비는 항상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이었다. 비는 항상 아이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에 맞고 있던 강아지를 노란 우산을 쓴 소녀가 구해주었다던가 아랫마을 언덕의 큰 나무가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잎이 아프다고 투정 부렸다던가 하는 일들을 얘기했다.



 아이는 그런 비의 얘기를 듣는 것이 참 좋았다. 비 오려는 냄새가 나면 누구보다 먼저 마루로 나갔다. 비의 이야기는 꽤나 길어서 아이는 끊지 않고 듣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엄마가 매일 아침 끓여두어 아직 김이 소록 나는 보리차 한 잔도 꼭 챙겼다. 마루에 폭신한 방석을 깔고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가끔 비가 늦게 찾아올 때면 마당의 나무에 사는 작은 새와 함께 흥얼거렸다. 비가 오면 부산스러운 비는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며 아이에게 수다를 떨었다. 지붕 위에서 얘기하기도 하고 처마 밑 풍경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마당 웅덩이에서 발장구를 치며 춤을 추기도 했다. 아이는 매번 그렇게 다양하게 바뀌는 비가 신기했고, 비는 한 결 같이 웃으며 들어주는 아이가 좋았다.


 그날은 비가 붉디붉게 화가 난 날이었다. 비에게는 만나면 깨끗한 비를 내려줘서 물을 챙겨주던 작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 그날도 아이를 만나기 전 아기 고양이를 잠시 만나러 왔었다. 아기 고양이는 반가웠는지 좁은 길 자동차 아래서 뛰어나왔고 달려오던 용달 트럭은 그만 빗길에 미끄러져 멈추지 못했다. 흙바닥에 빠알간 백일홍이 점점 크게 피어 갈수록 비는 더 성을 내었다.


 아기 고양이에게 나던 미약한 김이 사라지자, 비는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아이라면 자신의 분노와 슬픔도 전부 들어주리라 생각했다. 아이는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웃으며 비를 맞이했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가만히 성난 비만을 바라보았다. 비는 세차게 울어댔다.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그런 비를 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안아도 비는 안겨지지 않았다. 아이의 속눈썹에 빗물이 맺혔고 볼 위엔 눈물이 내렸다.



 며칠이 지났다. 비는 다시 아이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즐겁고 재밌는 얘기를 가지고 온 참이었다. 그런데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항상 아이가 기다리던 마루는 처연하게 반짝였다. 아이가 어디에 있을까 찾아보니 아이는 창문이 열려있는 작은 방 이불속에 누워있었다. 비는 반가워 아이의 봉긋한 이마에 빗방울 몇 알을 바람에 실어 보냈다. 두 눈을 감고 있던 아이가 나지막이 눈을 떠 비에게 인사했다. 비는 아이가 일어나자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이는 말간 미소를 띠며 비의 얘기를 들었다. 앞 동네의 작은 산과 힘겨루기를 해서 어떻게 이겼는지에 대해 한참을 떠들고 있을 무렵, 따듯한 보리차와 작은 그릇이 놓인 쟁반을 든 아이의 엄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의 엄마는 창문이 열려있어 화들짝 놀라는 낌새였다. 비는 아이의 엄마를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이야기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를 찰나였다. 쿵 하고 창문이 닫혔다. 비가 아이를 불러보았지만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세게 두드려 보아도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우렁차게 인사를 해도 창문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고,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비는 매일 같이 찾아왔다. 비의 욕심이 고이고 또 고였다. 청보리가 겨우 고개를 내밀고 물결에 일렁일 때, 아이의 집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껴안고 나왔다. 아이를 본 비는 오랜만에 만난 더더욱 크게 아이에게 인사했다.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거세질수록 아이의 엄마는 주르륵 녹아내렸고 아이는 점점 파랗게 웃었다. 실컷 떠들고 후련해진 비가 자리를 떠나자, 아이의 집은 고요한 바람만이 남았다.





글 쓰고 그린 사람 - 율힌 yulhin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작가 율힌입니다.
여러모로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여러분께 한 가지 공지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시리즈가 아닌
단편소설로 여러분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더 좋은 글, 다양한 글을 보여드리기 위해 잠시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개인 사정으로 인해 전포롱 작가님께서는 #11 가을 편까지만 함께 해주셨고,
앞으로  가을 시즌 두 번째 글부터는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작가님이자 오빠인 토마쓰리 작가님과 함께 글과 그림을 꾸려가려 합니다.

2021년 10월 3일, 가을이 가득 찬 시월의 첫째 주 일요일 오전 11시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준히 저의 글을 찾아주시는 너무도 소중한 독자 여러분께,  작가 율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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