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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힌 Jul 25. 2021

#6 장마

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비가 왔다. 


하늘은 잿빛이고 공기는 눅진했다. 비에 젖은 운동화는 찝찝하고 어제 널어 둔 수건에는 냄새가 꿉꿉하게 났다. 버스에라도 타면 다리에 달라붙는 우산은 질척했고, 사람들의 열기와 냄새는 쾨쾨했다. 도로에 차는 답답하리만치 꽉꽉 들어차 있고 길 위에 군데군데 패인 구덩이엔 시꺼먼 흙탕물이 가득했다. 바닥엔 누군가 짓밟은 지렁이가 낭자하게 널려 있었고 편의점 앞 큰 깡통에는 담배꽁초들이 둥둥 떠다녔다.


 불쾌했다.


어서 이 장마가 끝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인생에도 비가 내리는 순간들이 있다. 모든 게 축축 해지고 스멀스멀 곰팡이가 슬게 되던 순간들은 나에게도 빈번히 찾아왔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이었다. 좋아하던 이성친구의 집에서 놀던 중 앞집에 사는 날씬하고 이쁜 여자애를 보았다. 친구와도 너무 친해 보였다. 나보다도 더 친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을 보다 보니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여느 때와 같이 화장실로 들어가 양변기에 앉았다. 평소라면 만화책을 보거나 했을 텐데 그날은 유독 코끼리 다리처럼 널찍한 내 허벅지가 보였다. 허벅지는 점점 더 크고 두껍게 보였다. 그 순간, 우르르 하고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비가 내렸다.



 민요를 배우던 시기엔 무대에 꽤 많이 섰었다. 민요 선생님을 따라 KBS 국악한마당에도 출연해본 적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선생님 제자들의 대다수는 언니들이었다. 내 눈에 언니들은 너무 예뻤고 너무 잘했다. 이제야 배우는 꼬꼬마 주제에 난 왜 이 정도밖에 못하지? 화면에 나오는 내 얼굴은 왜 이리 달덩이 같지? 하며 언니들을 보던 눈으로 나를 깔봤다. 공연이 끝나고 찍은 단체 사진을 보면 내 사진만 오려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꿉꿉한 마음이 생겨버리자 하고 번개가 치더니, 다시 비가 내렸다.


 S라는 친구가 있었다. S는 가야금을 치던 친구였다. 피부도 하얗고 마른, 내 눈에 이 친구는 순수하고 청아해 보였고 이에 낀 교정기마저 귀여워 보였다. 웃는 모습도 예뻤다. 착하기까지 했다. 여름이 같이 캐리비안 베이를 가보기도 하며 고등학교 1학년을 거의 함께 보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를 못난이로만 보았기 때문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S와 친구로서 웃고 떠들기보다 부러운 대상으로서 견주어 보게 되었다. S가 빛날수록 나는 초라해졌다. 다른 친구들과 즐겁게 노는 것을 봐도 나는 왜 저렇게 못할까 하며 자책하기 바빴고, 그녀의 예쁜 모습을 보면 거울 속에서 나의 못난 모습만 찾아 내게 되었다. 점점 더 비교할수록 내 옹졸한 우정은 조금씩 갈라져 깊은 골이 생겼다. 일 년이 지나고 서로 반이 떨어지게 되자 S와 소원해지기 되었다. 이렇게 우정이란 게 허무하게 끝나버리자, 쏴아 하고 장대비가 내렸다.




 비는 조금씩 나를 주눅 들고 녹슬게 했다. 곰팡이가 뿌옇게 피니 스스로 제 맘도 찬찬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아무리 닦고 닦아도 유리창처럼 깨끗해지지 못했다. 비가 원망스러웠다. 비를 내리게 하는 하늘이 괴이해 보였다. 내가 이상한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언제까지나 이 잿빛의 장마가 이어지리라. 그렇게 믿어졌다.


 그런데 곰팡이가 끼고 이끼가 끼어 햇빛 한 줌 들지 않을 것 같던 내 마음의 창문을 쉴 새 없이 두드려준 이들이 있었다. 두드리다 못해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다. 스스로 이 창문을 열 수 있을 거라 다독여주기까지 했다. 몇 번을 일어날 것을 망설이고 다리에 수북이 쌓인 먼지와 곰팡이를 털어내 보기도 했다. 결국 제 힘으로 일어나 창문을 열자, 따사로운 햇볕이 온 마음에 스며들었다.






 여전히, 아직도 내 마음엔 비가 내린다. 세상엔 아름답고 훌륭한 것들이 너무도 많아서 나는 그들과 나를 저울질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그대로의 너를 사랑한다 속삭이는 햇빛이 있기에 나는 비가 두렵지 않다. 오히려 우습게도 나는 비가 좋아졌다. 비로 인해 나의 햇빛들이 더 소중하고 따스하게 느껴지기에, 비가 내리기에 스스로 조금 더 자랄 수 있기에.


 빗소리가 가슴을 울린다. 차가워진 공기가 부드럽게 내 살을 어루만진다. 행궁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물 웅덩이를 두드리는 빗방울이 참으로 옹골지다. 빗소리에 맞춰 푸르른 잔디와 하이얀 들꽃이 간들거린다. 제비는 돌담에 닿을 듯 말 듯 넘실댄다. 점잖던 소나무는 파랗고 가느다란 손을 이리저리 흔든다. 하늘도 소라삭 화장을 빗물에 씻어내고 말갛게 맨 얼굴을 내보인다. 나를 바라보는 이와 맞잡은 손이 몹시 포근하다. 발 끝에 스미는 차디찬 빗물이 싫지가 않다. 나는 비마저 사랑하게 되었다.




글 쓴 시누이 - 율힌 yulhin

그림 그린 새언니 - 전포롱 jeon polong



시누이와 새언니


시누이는 대학교 졸업 선물로 브라더 미싱기를 받았다.

언젠가 내 옷이나 나중에 엄마가 되면 생길 아가 옷을 만들어 볼 요량으로

미싱기를 받았다.

처음에 밑실만 몇 번 껴보다 잘 안 껴지니 시누이는 미싱을 배우는 것을 미루게 되었다.

그렇게 시누이의 미싱기엔 먼지만 쌓여갔다.

새언니는 요 근래 옷 디자인 수업을 시작했다.

평일이면 매일매일 서울로 수업을 받으러 간다.

미싱기는 전에 같이 작업하던 친구가 두고 간 중고 미싱기를 쓴다.

시누이의 새 미싱기는 쿨쿨 잠만 자고

새언니의 낡은 미싱기는 활기차게 움직인다.

시누이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실행하는 새언니의 반짝거림이 너무나도 눈부시다.

새언니를 본받아 시누이도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어 졌다.

"앞에서 이끌어주는 새언니, 뒤에서 밀어주는 시누이"가 되어 함께 인생을 걸어 나가기를

시누이는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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