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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넬리몰리 Jun 22. 2021

몸이 보내는 자발적 퇴사각

그것은 건강 적신호라고 부른다



 퇴사를 먼저 선택하는 이유


 이직은 무조건 재직 중에 하는 것이 좋다. 이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정말 어렵고 지치는 일이지만 우리 현대인들은 그 어려운 걸 모두들 해낸다. 어떻게든 재직 중에 이직처를 찾고,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하고, 두 업체 사이에서 타이밍을 조율하고, 결국엔 내 자리의 짐을 깨끗이 싸들고 나온다.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쳐왔더랬다. 한데 이제 그 국룰을 벗어나고 보니 알겠다. 이직에 앞서 (자발적으로) 퇴사한다는 것이 그만큼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어려운 데다 상당한 정신력을 요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자신감을, 혹은 낙천성을 요한다.


 내가 퇴사했음을 알렸을 때 지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물론 지갑의 상태였다. 어디 믿는 구석이 있나 봐? 그래, 퇴직금도 나오는데. 나는  모아둔 비자금은 없지만 퇴직금을 믿고 우선 퇴사라는 작은 공을 쏘아 올린 케이스다. 한데 이때 나의 심리에 지갑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이 두 글자뿐이었다.


 건강. 꽤 많은 상황에서 직장인들이 퇴사라는 카드를 잡게 되는 원인이자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궁극기. 바로 건강.



 건강을 망쳐본 자의 회고


 약 1년 전에 나는 몸이 보내오는 적신호를 느끼고 한 달간 휴직이라는 기회를 얻었었다. 하지만 여러모로 건강을 위해 노력하며 1년이 지난 지금 그때와 상태를 비교하면 그리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 왜였을까? 그건 바로 내가 되찾고자 했던 '건강'이라는 단어 앞에 아래의 수식어들이 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 [나의] 건강
2. [현재 시점에서의] 건강
3. [당장 성과를 거두는] 건강
4. [형태를 갖추고 있는] 건강


1.  조직의 건강은 나의 건강이 아니다.


 일에 진심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도 업무의 흐름이나 강도를 균형 있게 유지하고 효율적인 성과를 내려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런 경우가 생긴다. "A 씨의 이 업무는 순서상 내 업무가 끝난 후 넘겨받아 진행해야 하는데 다음 주에는 A 씨가 꼭 맡아야 하는 다른 일이 있어. 그러니 내가 이 업무를 이번 주 우선순위로 작업해서 A 씨가 먼저 끝낼 수 있도록 넘겨주자." 너무 훌륭한 업무 스킬이자 사고방식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종종 나라는 개인의 추가 근무를 불러오고 새벽 퇴근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이는 아주 단순한 예시지만 업무를 하다 보면 수없이 많은 구체적이고 다양한 상황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많은 선량한 직장인들이 이를 놓치고 산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개인은 어쩔 수 없이 개인이고 조직 속에서 어느 정도의 분리된 공간과 이기심을 유지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건강'이 정말 나의, 나만의 건강인지를 돌이켜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참 복잡해진다. 끄트머리엔 우리 사무실의 구조적 문제가 보이기도 하고, 팀 간 위화감을 인지하게 되기도 한다. 나는 기획 및 PM 팀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가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즉시 야근을 줄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그 외의 휴식시간도 줄였다. 출근을 조금 빨리하고 점심시간에 조금 더 빨리 업무에 복귀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퇴근 후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자니 업무가 이전처럼 원활히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조금 무리하면 맞출 수 있을 기한은 더 뒤로 밀렸고 타 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어느 정도는 타협해야 했고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많았다. 왜 조직 내에서 나라는 개인의 건강은 효율적 업무 흐름과 정비례 곡선을 이룰 수 없을까. 이게 가능한 조직을 찾는다면 거기가 바로 나의 평생직장이 될 터였다.


2. 건강은 미래 시제로 논하지 말 것


 "이 앱 출시가 끝나면 한 숨 돌리면서 건강 좀 챙기자." 약 6개월 전 이런 말을 내뱉은 내 입을 호되게 쳐야 한다. 앱 출시는 무슨, 지금 당장 그 숨인지 뭔지 돌리면서 건강을 챙기라고 엉덩이를 뻥 차 줘야 하는데.


 서른 중반에 들어서는 많은 친구들이 요즘 함께 카페에 가면 커피가 아닌 다른 음료를 택한다. 이유인즉 위가 아파서, 혹은 잠이 오지 않아서란다. 사무실에서 생활하면 건강을 망치는 많은 것들에 둔감해진다. 커피, 야근중 먹는 야식, 생리통을 참아내기 위한 진통제, 다리 한 번 펴지 않은 집중 근무 시간, 깜빡임을 잊은 눈꺼풀 같은 것들 말이다.


 "요즘 일이 바쁘니까"는 결국 아무 이유도 되지 못한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하며 살 것이고, 지금 당장 건강하지 못해 업무 효율도, 성취감도, 즐거움도 얻을 수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만약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사무실에서 지금 당장의 건강을 챙길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그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3. 홍삼 먹는다고 내일 덜 아프지 않아요.


 나는 건강을 망치고부터 멀티비타민과 스트레칭을 꼬박꼬박 챙기기 시작했다. 거의 1년이 지난 지금은 꽤나 성과를 봤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1년'이다. 나는 몸이라는 작은 우주를 너무 쉽게 봤다. 빅뱅 같은 사건이 아무 때나 터지지 않듯, 쉽게 손이 가는 방법들은 당장 내일 내가 출근하며 겪을 아픔을 반절로 줄여주진 못한다. 나의 현 상황에 맞는 즉각적인 방법을 찾아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너무나 자명한 논리다.


 내가 놓친 게 바로 이것이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식이요법을 취하는 것이었지만, 우리 팀의 인력 부족은 헤어날 수 없는 수렁 같았다. 진짜 수렁은 톱니바퀴가 어긋나기 시작한 내 몸속에 있었는데 말이다.


 즉각적으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약이나 주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을 잃어 본 직장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정확히 어떤 것을 얼마나 꾸준히 해야 이 아픔이 덜어지는지, 그리고 왜 나는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지. 이 딜레마는 어쩔 수 없다. 내가 일하며 살아가는 이상 함께 갈 뿐.



4. 병명이 '스트레스'는 아닐 텐데


 나는 만성 식도염을 달고 살았다. 한데 근 1년 사이에는 이유 모를 목감기나 열을 자주 함께 앓았다. 나는 그것이 단지 면역계 이상이라고만 생각했고 조금 우울했다. 조금 더 젊었던 시절의 나는 내 몸에 대해 학습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숙지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 시절이 모두 떠나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트레스만 더 쌓이는 병원 투어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중 정말 어느 평범한 날 의사가 스치듯 입밖에 낸 말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식도염이 더욱 악화되어 목구멍에 염증이 생기고, 그 염증으로부터 열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내 아픔의 형태를 파악한 순간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내 건강을 어떤 형태 없는 것으로 인지하기 시작할 때, 그런 우울이 온다. 어딘가 아파서 의사를 찾아갔을 때 "스트레스 때문입니다"라는 답변을 들어본 적이 모두 있을 터다.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무엇이 원인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메스를 쓰건 헬스장을 등록하건 할 것 아닌가. 내 몸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은 힘들고 두렵다. 나의 어딘가가 정상이 아니라는, 앞으로 남은 생을 이 몸으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막연하고 무의식적인 공포 때문이 아닐까.


 사람마다 이 노력의 형태도 다양한 것 같다. 나는 의학적으로 명쾌히 설명되는 것을 선호해서 의학 논문이나 매거진을 열심히 찾아보는 편이다. 부수적으로는 병원 투어에 굉장히 많은 돈을 할애하고 있다. 또 내 친구 중엔 정확한 의학적 해명보다는 이에 대처하는 본인의 루틴을 만드는 방법을 더 선호하는 이도 있다. 예를 들면 야근하기 전 무조건 10분 허리 스트레칭과 같은 루틴 말이다. 어떤 방법이건 좋다. 내 몸과 건강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명확히 파악하고 인지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심리적 장기전에서 고지를 점할 수 있으니까.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퇴사각은 선 하나로만 이뤄지지 않는 법. 여러 상황이 하나의 각으로 맞물렸을 때 우리는 그것을 퇴사각이라고 부른다. 나도 오로지 건강에 대한 염려만으로 퇴사라는 극약을 처방한 것은 아니다. 다만 건강이라는 카테고리가 너무나도 거대했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가 결단을 늦게 내린 점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자위하던 내 뒤통수를 거대하게 친 것은 다름 아닌 개인사였다. 나는 지난하게 이어지던 회사생활과 코로나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결혼식을 치렀는데, 조금 멀쩡해졌던 몸 컨디션이 여지없이 식을 며칠 앞두고 무너져 내리더니 당일 아침엔 진통제 두 알에 의지해 식장에 입장할 지경이 되었다.

 

 회사를 다니는 것은 행복한 삶의 일부여야 한다. 정작 내 생의 중요한 순간을 내 건강이 망치고, 그 건강을 위한 긍정적 대처를 회사 내에서 할 수 없다면 내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일까. 굳이 어딘가에 화려한 옷을 입고 입장하는 순간이 아니더라도 내 일상은 모든 순간이 소중한데 말이다.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깨달음치곤 초라하다. 게다가 향후 직장생활을 이어나가며 실천에 옮길 엄두 또한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딜레마를 부르짖으며 열심히 출근할 밖에.


 조금은 암울하기도 한 이 글을 어떻게든 긍정적인 불씨로 살려내야겠다는 의지가 내 안에 타오른다. 그리고 그건, 퇴사 후의 일상으로 이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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