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생활을 시작하며 홈스테이 기간을 2주로 잡았기에 거의 학교를 시작하자마자 홈스테이에서 나가기 전에 새로 지낼 곳을 찾아야 했다. 처음에는 홈스테이를 연장하면 되는 거 아닌가 라는 안일한 생각이었지만 그건 힘들 것이라는 홈맘의 한마디에 발등에 불 떨어져 사방팔방 알아보고 다니게 되었다.
아일랜드에서는 부동산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을 통해, 페이스북, 웹사이트를 통해 보통 집을 구한다.
좋은 집을 구하기에 경쟁이 심하다 보니 많은 정보를 얻고 바삐 움직여야 한다.
초반에 공고를 보고 연락을 하면 다 구했다고 하거나 내 조건과 맞지 않아 꽤 절망하기에 이르렀었다.
그러던 중 하늘이 도운 걸까 갓 친해져 나보다 먼저 떠나는 같은 반 친구가 지내던 집에 내가 소개받게 되었다.
뷰잉 날짜를 잡고 집으로 찾아가서 주인으로 보이는 여성을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샌디. 적갈색 머리에 창백하듯 하얀 피부의 그녀는 조용하며 살짝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 같이 찾아간 친구들은 밖에서 기다릴 것을 요청하여 나 혼자 들어가게 되었다.
집은 아늑하고 마음에 들었다. 학교에서도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이니 꽤나 괜찮은 컨디션이었다.
알고 보니 이 집이 샌디의 집이 아니라 샌디가 고양이와 함께 살기 위해 이 집을 통째로 빌렸고 남는 방을 세를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나눠볼수록 처음 날카로웠던 인상과는 달리 상냥하고 사려 깊었다.
다행히 내가 샌디의 마음에 들었는지 짧았던 하우스 메이트 인터뷰는 긍정적으로 끝났고 드디어 집을 구하게 되었다. 해외에서 셰어하우스를 구할 때 간혹 인터뷰를 보기도 하는데 들어보니 셰어하우스에서 성격차이, 생활방식 차이로 마찰이 발생하곤 하는데 이를 가능한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제 다 끝났나 싶었지만 문제는 하나 남아있었다. 홈스테이 퇴실이랑 새 집 입주일 중간에 한 주가 비는 것이다. 마침 성수기라 학교 근처의 호스텔은 전부 만실이라 걱정에 빠져 있는데 옆에서 친구가 여기는 어때라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조건을 보니 학교에서 대략 40분 거리이기에 멀지만 근사해 보이는 집에 아주 파격적인 가격이라 당장 예약을 해버렸다.
처음 집에 찾아가는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집에 도착하고 보니 생각보다도 멋진 집이었다.
영화에서 봤던 것 같은 클래식 한 거실에 내가 배정받은 방은 마치 고흐의 방을 생각하게 하는 아늑하고 귀여운 방이었다.
화장실이 딸린 방은 아니었지만 방 안에 세면대가 있었던 적은 없어서 꽤 신기했다.
게다가 주인이었던 코너 씨는 정말 섬세하게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처음엔 조용한 코너의 말을 내가 말을 잘 못 알아 들어서 삐걱거리긴 했지만.
지냈던 에어비앤비가 멀었기 때문에 내가 발걸음 하고 경험하는 골웨이가 더 늘어났다.
친구들과 실컷 놀고 어슴푸레한 하늘이 되는 그 시점에 탁 트인 하늘을 보며 귀가를 했다.
그간 이 집에서 누군가와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일요일 귀가를 하니 어떤 커플이 저녁을 해 먹고 있었다.
그때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인사를 나누고 커플의 제안에 자연스레 합석을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커플과 각자의 언어,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저녁을 먹고 어느샌가 쿨하게 해산했고 내심 아쉬운 마음에 다음날 떠난다는 커플에게 한국에서 챙겨 온 작은 선물을 방 앞에다가 뒀다.
이 집에서 살면서 지독한 감기에 걸려서 거의 앓다시피 했다. 이 좋은 집에서 학교에 갔다 오면 방에 들어가자는 게 일상인 무료한 날이 며칠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들어섰는데 곱슬머리에 쇼트커트를 한 내 나이또래의 여자애가 나를 반겼다.
나는 가방을 두고 나온다고 말하고 방에 들어가 가방을 말 그대로 던지고 내려와 그 여자애를 만났다.
이름은 한나, 리히텐슈타인에서 온 친구였다. 그녀의 생김새나 발랄한 성격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를 떠올렸다. 내향인으로서 원래 같으면 이렇게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가 반갑지만은 않았겠지만 감기를 앓는 동안 본의 아니게 격리생활을 하면서 내심 사람과의 교류가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한나의 아일랜드 여행은 특별한 이유를 담고 있었는데, 아픈 동생을 위해 넓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대신 여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밝아만 보였던 그녀였지만 꽤 무거운 사연을 안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에너지는 나뿐만 아니라 자연스레 다른 게스트도 모았다.
그렇게 총 넷이 모이게 되었다. 영국에서 온 코너, 프랑스에서 온 에밀. 그들도 아마 생각지도 못했을 텐데 홀리듯 자리에 앉았다. 코너는 유일하게 차를 가지고 있어서 다 같이 마시는 맥주를 사다 주기도 했다.
그렇게 철저히 처음 모인 사람들. 어색하기 그지없을 수도 있겠지만 예상외로 아주 재미있었다.
일단 적당한 알코올을 곁들이니 웃기는 일들도 많았고 나는 뜬금없이 코너의 악센트가 부럽다고 칭찬을 했지만 코너는 아기 때부터 가진 악센트라고 어리둥절 해 했다.
어차피 각자 방까지는 몇 걸음 안 되니 신나고 편하게 놀다가 적당히 파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날 주방에서 이런 편지를 발견했다.
한나는 일정이 있어 편지를 남기고 갑자기 떠나게 되었다.
아주 우연으로 내가 나가는 길에 탄 버스에서 한나를 만나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내가 에어비앤비에서 나가는 날 아침을 먹던 코너가 흔쾌히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여 차를 얻어 탔다. 망설이던 코너는 연락처를 물었고 한국에 오게 되면 연락하라고 했지만 물론 그 이후로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에어비앤비를 거쳐 드디어 내가 살 집에 도착했다. 이 아담한 뾰족 지붕의 집이 벌써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