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오찬 Jun 09. 2021

Since 1968, 낙원동의 서울미래유산 냉면

서울 종로구 낙원동 유진식당

오랑캐를 오랑캐로 제압하는 계책을 <이이제이>라 한다. 미식의 세계에서도 이러한 논리는 그대로 적용되어 더운 여름에는 삼계탕을 먹어 열을 다스리고, 추운 겨울에는 차가운 냉면으로 추위를 달래기도 한다.


이냉치냉의 대표격인 냉면은 사실 겨울이 가장 맛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음식이다.

면의 주재료인 메밀은 늦가을에 수확하는 작물이고, 육수로 사용하는 동치미는 단맛이 도는 가을 이후나 월동무를 사용했을 때 제대로 맛이 난다. 육수를 낼 때 사용하는 꿩고기는 겨울 농한기 즈음이 축적된 지방 때문에 맛있는 시기이다. 심지어 냉장 기술이 없던 시대, 차가운 요리는 당연히 겨울에 만들기 용이했을 터이니 냉면은 겨울 제철 음식이라 해도 무방하다.


탑골 공원 뒤쪽 골목에 자리 잡은 이 식당은 1968년 함경도 출신의 문용춘 옹께서 개업하여 현재 2대째 반백년 넘게 운영 중인 노포이다. 개업 당시 식당 최초 메뉴는 창업주의 고향 음식인 아바이 순대와 국밥으로 알고 있는데, 이후 설렁탕과 평양냉면, 녹두 지짐이와 돼지국밥 등으로 재편되었다.


평냉부심, 면스플레인, 면심보감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평양냉면은 대표적인 <덕후 음식> 중 하나인데, 특기할만한 사항은 평양냉면이 단독 주연이 아닌 식당은 뛰어난 퀄리티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외면받는 성향이 있다.


서울에서 평양냉면 노포 성지로 사랑받는 우래옥보다 오히려 먼저 평양냉면을 선보인 조선옥도 소갈비가 메인이니 평냉덕후들에게 후한 점수를 받지 못하고 있고, 서울미래유산으로까지 선정된 유진식당 역시 출발선이 냉면이 아닌 순대와 국밥이니 역시 인지도에서 떨어진다.


주문한 메뉴는 물냉면과 녹두 지짐이이다.

내 기준으로 장충동 평양면옥이 소가 쳐다본 듯한 극도의 슴슴함이라면 을지로 우래옥은 그래도 육수의 진향이 소가 반신욕 정도는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 평양냉면 입문자들의 첫 경험이 우래옥에서 이루어지는데, 오늘 만난 이 식당은 소가 반신욕을 하다가 세수까지 한 듯한 감칠맛 나는 육수가 아주 제법이다. 진한 육수와 면의 메밀향 조화가 아주 괜찮았는데 툭툭 끊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함량이 되는지 입 속에서 감도는 메밀향과 제대로 삶아낸 수육, 슬라이스 무와 오이까지 각 재료들의 오케스트라가 꽤나 준수했다.


녹두 지짐이는 투박하게 갈아낸 녹두에 김치와 고사리, 돼지고기를 넣고 돼지비계 기름에 두껍게 튀겨냈는데 겉바속촉의 조화가 아주 훌륭했다.


회사 지근거리에 내가 모르는 평양냉면 식당이 있다 하여 호기심에 방문했는데, 음식을 경험하고 나올 땐 냉면 한 그릇이 뭐 대수라고 고된 하루가 보상받은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 추가잡설

주머니 사정 빤한 탑골 공원 노인분들이 자주 찾는 식당이다 보니 서울 중앙 도심의 음식 가격이라기엔 터무니없을 정도이다. 실제 창업주의 가게 경영 철학이 <노력과 봉사>였다고 하니 이 식당은 이문을 남겨 경제적으로 성공하겠다는 것보다는 식당을 찾는 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이문 덜 남기고 <대접>하겠다는 개념이 강한 곳이다.


평양냉면 8천원, 설렁탕 5천원이라는 가격도 놀랍지만, 소주 한 병은 3천원이다. 심지어 십수 년 전까지 포장마차에서나 가능했던 소주 반 병 1.5천원 주문이 가능한 곳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