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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수 Sep 06. 2024

10화. 여공(女工)

하고 싶은 이야기 / 에세이   

  입사해서 사장비서실에 근무했다. 사장의 지시를 받아서 회사 전반적인 업무를 감독하고, 그룹 계열사들의 회의 준비를 하고, 가끔 사장을 수행하는 역할도 했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여러 개의 공장에 출장을 가서 생산관리 등 전반적인 업무 상황을 확인하는 일도 했다. 회사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생산, 판매 및 회계 등 실무에도 어느 정도 눈을 뜨게 되었다. 이 기간이 오랜 회사생활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공장은 부산, 마산 등 여러 도시에 산재되어 있어서 매월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부산공장은 섬유제품을 만들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봉제공장이 있었다. 현장에 들어가기 전에 양복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끝이 보이지 않는 재봉틀 앞에서 작업하는 여공들의 수많은 눈동자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였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그녀들은 수줍은 표정을 짓는 젊은 남자 사원의 모습을 연신 힐끔 쳐다보았다.

  라인을 돌면서 작업 상태를 확인하던 중, 눈망울이 또렷한 어려 보이는 여공이 눈에 띄었다.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나이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재봉 작업을 하는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산업화에 젊은이들의 민주화운동으로 많은 희생을 당하면서 공부했던 지난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 그런 현장은 그들과 함께 생산성과 품질관리라는 현실로 바뀌었다.

      

  공장에서 품질관리 성공사례 대회가 열리는 날, 사장을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전 직원이 모여서 총 5개의 생산부에서 차례로 발표하는데, 마지막 발표자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공이었다. 그녀가 발표하는 내용은 들리지 않았고, 누구인지에만 몰두하였다. 그녀는 바로 눈망울이 또렷한 어려 보였던 현장 여공이었다. 파란 유니폼을 입은 수많은 여공 중 한 명이었지만,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인상이었다. 

  그녀는 얼마 후, '불량률 제로'를 목표로 하는 품질관리과로 생산직에서 사무직으로 발령이 났고, 그녀를 생산 현장이 아닌 생산관리부 사무실에서 볼 수 있었다. 그녀를 자주 보지 못했지만, 다른 직원에 의하면 야간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묵묵하게 자기 일만 하는 그녀의 점점 밝아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면서 몇 년이 지나갔다. 그리고 해외 생산법인으로 발령을 받아 그녀를 오랫동안 볼 수 없었다.

  본사로 복귀해서 부산공장 생산관리 책임자로 발령을 받았다. 섬유 중심의 봉제공장들이 대부분 해외로 이전해서 고급제품과 기술개발을 중심으로 운영했다. 3개의 신발공장을 통폐합해서 매출 규모는 유지했지만, 생산직원들은 많이 감소하였다. 생산 현장에서부터 눈여겨봤던 여직원은 어느덧 야간 대학을 졸업하고 퇴사를 한 후였다. 고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직원의 말을 끝으로 그녀의 기억은 사라져 갔다.           


  최루탄 냄새를 맡으면서 학교에 다녔던 수많은 젊은이가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같은 젊은 노동자들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노동문제를 개선해 나갔다. 회사에 다니면서 국내뿐 아니라 해외 노동상황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꼈다. 공장에 많은 노동자와 일을 하면서 그들의 애로사항을 들어주었다. 특히, 해외에서는 공장을 수시로 순시하면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학 다닐 때 금서라고 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연작소설집을 친구에게 빌려서 본 적이 있다. 1970년대 서울 무허가 판자촌에 살던 빈민층을 지금의 성남시로 이전하는 과정과 공업단지 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도시 재개발로 밀려난 서민 가정의 고통을 통해서 그려낸 작품이다. 얼마 전 이 소설집의 작가인 조세희 씨가 별세했다. 그의 책과 함께 노동 현장을 뛰어다니던 친구들이 생각이 났다. 

  조세희 작가가 쏘아 올린 난장이의 작은 공들이 지금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중 한 사람이 공장에서 오랫동안 보아왔던 그녀였다. 얼마 전 우연히 만난 직장 동료를 통해서 그녀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부산에서 노동자를 위한 법률 상담소를 개설해 20여 년간 사회운동가로 활동을 했다.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는 그녀의 강인한모습과 함께 슬기로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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