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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브라쇼브의 드라큘라

나는 추억 여행을 한다. / 에세이

by 김창수

내가 헨리 코안더(Henri Coandă)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첫인상은 이태리의 어느 공항을 연상케 했다. 루마니아(România)는 라틴족이 살고 있는 나라이다. 200여 연간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아서인지 그들의 생김새, 언어, 음식도 이태리와 비슷했다. 공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도인 부쿠레슈티(București)로 가지 않고, 차를 렌트해서 루마니아의 서북부의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있는 브라쇼브(Brasov)로 향했다.

그 지방은 가옥이나 사람들의 옷에서 아직도 유럽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오래된 건물들로 가득 찬 브라쇼브의 거리를 걷다 보니, 스파툴루이 광장(Piața Sfatului)으로 이어졌다. 뒷길로 들어서자, 많은 관광객들이 대낮부터 카페에서 루마니아 와인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카페에 들어가 점심으로 루마니아 전통 음식인 사르말레(Sarmală)와 와인을 한잔 시켰다.


브라쇼브를 방문한 이유는 근처에 있는 브란성(Bran Castle)의 성주인 ‘드라큘라(Dracula)’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남서쪽으로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한 브란성은 트란실바니아 알프스 산맥이 에워싸고 있어, 성을 지켜주는 호위병들처럼 보였다. 언덕 위에 암벽을 깎아 세운 위치에 있는 브란성은 생각했던 음침하고, 스산한 것과 달리 하얀색의 벽체와 오렌지색 지붕으로 이뤄져 밝아 보였다. 이곳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드 왕과 마리 왕비 부부가 사용했던 유럽 중세의 전형적인 여름 궁전이었다.

입구 쪽으로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나의 목을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뒤를 쳐다봤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관광객 몇 사람들이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 같아서 나는 부리나케 관광객들에게 따라붙었다.

위층에는 마리 왕비가 모은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왕의 식당, 마리 왕비의 침실, 그리고 피아노와 소파가 놓여 있는 응접실 등이 있었다. 왕이 지내던 곳이라고 하기엔 소박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고, 내부의 전체적인 모습은 생각과는 달리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아담한 성이었다.

앞에 가던 관광객들과 거리가 멀어지면서 나 홀로 지하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갑자기 무엇인가가 내 뒤에 바짝 달라붙어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천장에 켜 있는 전등이 깜박거리자,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길어 보이던 비밀 통로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내 걸음은 빨라졌다.


브란성은 1212년 독일 기사단의 요새로 만들어졌다. 15~16세기에는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 공국을 잇는 통로 역할을 하면서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헝가리 왕국을 지키는 관문이 되었다. 브란성이 유명해진 것은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가 흡혈귀 소설 ‘드라큘라’를 쓰면서, 드라큘라성으로 알려지면서부터였다. 실제 주인공은 이 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3세 바사라브(Vlad III Basarab)였다. 그는 블라드 ‘체페슈’ 또는 블라드 ‘드라큘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체페슈’는 루마니아어로 ‘꿰뚫는 자’라는 뜻으로, 죄인이나 포로를 꼬챙이에 꿰어 죽이는 공포정치를 하여 붙은 별명이다.

블라드는 재위 기간에 적과 범죄자를 가혹하게 다뤄 악명을 떨쳤다. 특히 오스만 튀르크가 침공할 때에는 앞에 나가 진두지휘하는 용맹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잡은 포로들은 어김없이 날카로운 창끝에 꽂아 브란성 제일 높은 곳에 걸어두었다. 그 창날은 죽은 포로의 입으로 관통되어 있었다. 멀리서 진격하던 오스만튀르크의 병사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더 이상 싸울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소설가 스토커는 블라드의 이런 소문과 그의 이름 'Blood(피)'라는 연상을 통해서 ‘드라큘라’ 소설을 완성했을 것이다.


브란성을 나와 트란실바니아 농촌의 전통 가옥들을 보면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브란성 근처의 작은 호수가 딸린 정원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호수에는 오리 두 마리가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드라큘라’의 환영(幻影) 속에 빠져 있던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나왔다. ‘드라큘라’가 실제 존재하는 인물이던, 가공의 인물이던 상관없다. 어릴 적부터 읽었던 소설, 영화 또는 포스터에서 본 마음속의 드라큘라가 저 멀리 보이는 브란성에서 잘 가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웃음 속에서 빨간 이빨이 드러나있었다. 안녕! Mr. Bl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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