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3화. 해외여행(1)

나는 '시고르자브르종'이다 / 연재소설

by 김창수

눈 덮인 산이 날씨가 풀리고, 눈이 녹으면서 다시 파란색을 띠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산에 다녀온 후 아침, 저녁으로 우리에게 밥을 주고 닭장에서 달걀을 꺼내오는 일 외에는 며칠간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우리는 그런 할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지만, 신경 쓰이지 않게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게 움직였다. 우리는 집 안에서 할머니 방문만 보고 앉아있었다. 가끔 방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두 눈을 부릅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가 다시 조용해지면 우리는 자리에 다시 앉아 서로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조용한 집이었지만, 지루하지 않게 지나갔다. 동네에서 개 짖은 소리가 들리면 신경이 쓰였고, 문밖에서 누가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깜짝 놀랐다. 할머니가 한 번씩 문을 열고 마루에 앉아서 집 안을 둘러볼 때면 혹시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걱정이 앞섰다. 할머니가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가면 우리는 조용히 뒤를 쫓아가서 가만히 그 앞에 앉아 할머니가 나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니들캉 산책도 같이 못 가서 미안테이. 내 몸이 안 좋은데, 곧 괘안을 끼다. 밥도 마신는거 마이 해줘야 하는데, 조그마 기다리거레이.”

할머니는 힘없이 말하면서 우리에게 미안한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얼굴이 푸석해진 할머니를 보면서 괜히 엄마 생각이 났다. 할머니가 애지중지 키웠던 엄마가 사라지면서 말은 없었지만,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엄마가 미우면서 보고 싶었다. 오늘도 하늘의 별들은 하나둘씩 나타나서 반짝이는데, 내가 보고 싶은 별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얼굴이 처음 내가 이 집에 왔을 때 봤던 그 모습처럼 다시 밝아졌다. 걸음걸이도 달라졌고, 목소리도 커졌다. 옆집 아줌마가 자주 집으로 왔다. 오늘도 아침부터 그녀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할매예! 얼마 전에 신청했던 여권 놔왔심더.”

“벌써 나왔나. 어디 있노. 보여둬.”

할머니는 생전 처음 만든 여권을 옆집 아줌마에게 받아 들고 신기한 듯, 한 장씩 넘기면서 세심히 살펴봤다.

“사진이 괘안네. 뭐라고 썼는지 모르겠고, 숫자만 알겠네. 근데 와이리 복잡노.”

할머니는 여권을 보고 또 보며 얼굴에 웃음기가 가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의 행복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할매예! 오래 곗돈 붓느라 고생 많았슴니더.”

“처음 해외여행계 하자고 해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난 안할란다고 반대 안했나.”

“그땐 할아버지 돌아가신제 얼마 안되서 그랬겠지예‘”

“할배도 살아있으면 같이 갔을 텐데.”

할머니는 눈 덮인 먼 산을 멀뚱히 쳐다봤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상황을 이해했다. 얼마 전 다녀온 할아버지의 묘소에서 그녀가 절을 하고 앉아서 넋 놓고 있는 모습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행복감이 또 다른 슬픔을 유발했다.


할머니는 가끔 옆집 아줌마를 불러서 부탁하는 일 말고는 여행 준비하는지 방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 낯설기도 했겠지만, 뭘 준비해야 할지도 잘 몰랐을 것 같았다. 여행지가 이곳의 겨울이 아니고 여름 날씨라고 하니, 장에 넣어 둔 여름옷을 꺼내야 할 판이었다. 할머니는 얼굴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다가도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옆에서 보는 우리는 할머니가 움직일 때마다 탁구 시합 구경하는 사람들처럼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여행 출발 날짜가 다가오면서 할머니의 가방만 커졌다.

할머니는 옆집 아줌마를 불러 짐 싸놨는데, 부족한 게 없는지 봐달라고 했다.

“할매예! 이게 뭡니꺼.”

그녀는 할머니 짐을 하나씩 확인하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리 정돈도 되지 않았지만, 해외여행이 처음이라서인지 불필요한 물건이 너무 많았다.

“호텔에서 잘낀데, 수건 같은 건 필요 없슴더. 해외로 이사 갑니꺼?”

옆집 아줌마의 탄식이 나올 때마다 할머니는 아무 생각 없이 넋을 놓고 앉아있었다.

“놀러가는게 와이리 힘드노.”

옆집 아줌마는 할머니의 짐을 풀어서 다시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빼꼼히 열린 방문 앞에서 앉아 할머니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옆집 아줌마가 할머니를 야단칠 때는 야속했지만, 가방이 반으로 줄면서 마음도 그만큼 가벼워졌다.

keyword
이전 12화12화. 눈 덮인 산(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