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고르자브르종'이다 / 연재소설
할머니는 눈 덮인 산에서 내려온 이후로 우리 밥을 챙겨 주는 일 외에는 며칠을 방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할아버지를 보지 못해서인지 할머니의 아픈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옆에 있는 그녀와 답답할 때면 집 근처를 산책했다. 그녀도 이제는 자기 영역을 표시하면서 다녔다. 뒤뚱거리는 뒷모습이 아직은 귀엽기는 했지만, 암컷으로서의 자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멀리서 큰 개가 접근하면 내 뒤에 숨었다가 급할 때는 집으로 도망쳤다. 동네에서 이미 그녀에 대해서 소문이 났는지 집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개들이 많아졌다. 나는 그들이 나타날 때마다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할머니가 아침부터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밀렸던 일을 하기 위해서 이곳저곳 다니며 분주했다. 그동안 못했던 산책을 시작했다. 이제 그녀의 옆에는 우리가 있었다. 할머니가 그녀와 같이 데리고 다녔다.
“니들은 건강하게 오래 살야한데이.”
눈이 녹지 않아 길이 미끄러웠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눈을 밟으며 가는 느낌이 좋았다. 동네 어귀를 돌아서 산 근처에 있는 얼지 않은 얕은 개울가에 도착했다. 우리는 부리나케 물을 마셨다.
“시원하제? 마이 무그라. 저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이라 약수인기라.”
할머니는 우리가 맛있게 물 먹는 모습에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엄마 냄새가 났던, 할아버지가 묻혀 있는 눈 덮인 산을 쳐다보았다.
나는 할머니가 언제부터 혼자 지냈는지, 왜 가족이 없는지 궁금해졌다. 다른 집은 할아버지부터 갓난아기까지 많은 사람이 같이 살고 있는데, 할머니는 이 넓은 집에서 우리와 살면서 행복한지 모르겠다. 할머니가 없는 적막한 집에서 엄마가 사라지고 혼자서 지낼 때는 정말 무서웠다. 할머니도 우리가 없으면 얼마나 외로울지 걱정되었다. 외국에 있는 자식들은 왜 자주 오지 못할까, 요즈음 부쩍 늙어 보이는 할머니를 보면 그런 자식들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비록 가족과 함께 살지 않지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생활을 하고 있다. 다행히 동네 아줌마들이 가끔 놀러 와서 왁자지껄하며 할머니를 즐겁게 해주고 있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후, 할머니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이제 나도 살 만큼 살았으니, 당신 옆으로 가고싶네예.’라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할머니마저 내 곁을 떠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더 올라갈라케도 길이 미끄러워 못 갈 것 같데이. 이제 고마 집에 가제이.”
할머니는 할아버지 산소에 가고 싶은 듯했으나, 길이 미끄러워 자신이 없었는지 한숨을 쉬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할머니가 제사 지내고 며칠 동안 가슴앓이를 한 것 같았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심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자식들의 무관심에 대해서는 상심이 클 것 같았다. 할머니가 핸드폰을 잘 가지고 다니지 않는 이유도 그들에게 전화가 잘 오지 않았거나 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는 아쉬움을 털어버리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동네 아줌마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수다를 떠는 것이 할머니에게는 핸드폰의 무게보다 더 편하고 가벼웠을 것이다.
동네는 눈이 덮여서인지 조용했다. 내가 눈을 밟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멀리 퍼져나갔다. 오늘따라 개들도 하얀 천국에서 잠을 자고 있는지 짖지를 않았다. 눈이 미끄러워 조심해서 걷는 할머니의 모습이 각시가 갓 시집와서 혹시 발소리가 들릴까 봐 시어머니 몰래 남편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뒤를 쳐다볼까 봐 우리도 사뿐히 그녀의 발만 보면서 같이 걸어갔다. 찬 바람이 불면서 눈이 날려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데, 동네 어귀에서 동네 아줌마를 만났다.
“할매! 눈 와서 미끄러운데 어디 다녀 오능교?”
“할배 있는 산에 다녀 안오나.”
“무슨 일 있능교?”
“아이다. 얼마 전에 제사 지내고 할배한테 다녀 안왔나, 그런데 자꾸마 할배가 꿈에 나타나는기라. 궁금해서 할배 산소에 가려고 했는데, 올라가는 길이 미끄라바 그냥 내려왔데이”
“무슨 꿈인데에?”
“길가에서 추와주겠데이. 나중에 우리 집으로 와서 이야기하제이.”
할머니는 아줌마와 서둘러 이야기를 끝내고 집으로 왔다.
할머니가 대문을 여는 순간, 찬바람이 집으로 몰아치면서 대문 앞에 쌓였던 눈이 집 안으로 몰아쳤다. 할머니는 대문을 닫고 ‘조그만 기다리레이 저녁 얼른 만들어 주꾸마.’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몸에 붙어 있는 눈을 털고, 담요가 덮여 있는 자그만 우리의 집안으로 추위를 피했다. 할머니가 꿈에서 할아버지를 자주 만나는 게 좋은지 잘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그녀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멀리 눈 덮인 산 밑으로 빨간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