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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눈 덮인 산(1)

나는 '시고르자브르종'이다 / 연재소설

by 김창수

잠에서 깨어나니,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눈이 집 마당을 덮었고, 푸르던 산에도 눈꽃이 내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옆에 있는 그녀가 처음에는 신기하듯 보면서 내리는 눈을 따라 눈동자를 돌리더니, 갑자기 일어나서 앞발로 하나씩 잡으려 했다. 이리저리 눈을 쫓아다니며 쓰러지기도 했지만, 금방 일어나서 그 짓을 계속했다. 마당에 쌓여가는 눈과 달리 그녀의 몸에 붙은 눈은 금방 녹아버렸다. 그녀에게도 신나는 눈 세상이 왔다.

할머니는 무슨 일인지 오늘은 깊은 잠에 빠져서 아직 인기척이 없었다.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조용해지는 걸까?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할머니는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보다. 갑자기 닭 울음소리에 깜짝 놀란 우리는 집으로 들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혹시 할머니가 일어나서 닭장에 무슨 일이 났는지 뛰쳐나올까 봐 그녀의 방만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할머니 방에 불이 켜지고 방문이 열리더니, 빼꼼히 얼굴을 밖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눈이 왔네.’ 하면서 밝은 미소를 띠었다. 조용히 있던 우리를 힐끗 쳐다보며 ‘너네들은 이런 세상 처음 볼끼다.’하면서 추운지 금방 방문을 닫았다.

동한기에 들어서면서 할머니는 농사일이 없어서인지 거의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만 있었다. 우리 밥을 챙겨 주기 위해서 부엌을 들랑거리거나, 닭장 모이를 주면서 달걀을 가져오는 정도가 전부였다. 할머니는 동네 경로당에는 가지 않았다. 가끔 동네 아줌마들과 집에서 점심 먹고 화투를 치면서 떠드는 소리가 온 동네 메아리쳤다. 자식들은 외국에 있어서인지 그들을 본 적은 없다. 할머니의 겨울은 외로웠지만, 우리가 옆에 있어서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하루는 할머니가 아침부터 갑자기 바빠졌다. 옆집 아줌마가 일찍 집으로 와 부엌에서 같이 일을 했다. 무슨 음식을 하는지 몰라도 향기로운 냄새가 집안으로 퍼졌고, 우리는 침을 흘리며 할머니가 가져다줄 밥그릇만 기다렸다.

“할매요! 혼자 돌아가신 할배 제사 준비한다고 욕보네예.”

“무슨 욕본다고 그라노. 아이들이 외국에 살아서 내가 한다 안켔나. 갸들에게 시킬 수도 없고, 우짜겠노. 내가 죽기 전까지는 해야겠제.”

나는 할머니의 슬픈 얼굴을 자주 보지 못했다. 방에서 TV를 보다가 ‘우야노! 우야노’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녀가 슬프다고 생각했다. 그런 할머니가 오늘 같은 날은 정말 힘들고,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할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외국에 있는 가족과는 생이별로 혼자 살면서 할아버지 제사를 챙기는 할머니의 마음이 안쓰러웠다.

“벌써 돌아가신제 십 년도 넘었는데, 아직도 옆에 있는 것 같네. 거기서 내 올 때를 기다리고 있겠제. 퍼뜩 가야 할 텐데 와이리 시간이 안가노.”

“뭔 소리 하능교. 할매는 아직도 팔팔한데 그런 소리 하지도 마소.”

전 부치면서 옆집 아줌마랑 할머니 하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밤늦게 제사를 끝내고, 할머니는 음식을 정성스럽게 담아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다. 내가 방에 불이 켜져 있을 때까지 자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동안 할머니가 준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하늘에는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어 대낮같이 밝았다. 할머니의 방에 불이 꺼지자, 주위는 정적만 흘렀다. 밥을 많이 먹어서인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옆에 있는 그녀는 코를 골면서 이미 꿈나라로 갔다. 가끔 다른 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온 동네로 퍼져나갔다. 닭장에서 알 낳은 소리가 들려왔다. 겨울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아침에 일어나 부엌에서 음식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했다. 방으로 들어가더니 두툼한 옷을 입고 나왔다.

“니도 같이 가자. 저 산에 있는 남편한테 갈끼다. 야는 힘들테니 놔두고 가자.”

나는 할머니를 따라 길을 나서는데, 뒤에 있던 그녀가 끙끙거렸다. 뒤를 쳐다보다가 그녀에게 다가가서 혀로 얼굴을 핥아주었다. 내가 가끔 그녀에게 보여주는 관심이었다. 저 멀리 가고 있는 할머니 뒤를 쫓아갔다. 할머니가 간 곳은 지난여름에 엄마 찾으러 갔던 산이었다. 눈이 쌓여 있는 길이 조금 미끄러웠으나. 할머니는 자주 가봤던 길이라서 그런지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나는 할머니 뒤를 따라서 높지 않은 산 중턱까지 올라갔다.

“여기데이. 할배 머리에 눈이 쌓였네.”

할머니는 옆에 있던 싸리 빗자루로 묘지에 덮여 있는 눈을 쓸었다. 가져온 음식을 상석(床石)에 가지런히 차려놓고, 남편이 즐기던 막걸리 한잔을 따라 올려놨다.

“어릴 적 이 산에서 당신이랑 같이 뛰어놀던 때가 그립네예. 벌써 60년이 넘어갑니더. 그때는 뭐가 그리 좋은지 몰랐는데, 이제사 생각하니 행복했던 날이었지예.”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절을 하고 앉아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가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이제 나도 살만큼 살았으니, 당신 옆으로 가고 싶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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