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소 실리콘 사각 깔때기
우리 집은 2리터 생수를 사서 마신다.
정수기를 계속 사용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렌털비, 관리 등 생수를 사서 마시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판단이 섰다. 식구가 3명으로 적고, 낮에는 학교, 직장 등 나가있는 시간이 많은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여름이 되면 생수의 공급과 소비는 더 많아진다.
냉장고에 잘 보관된 시원한 생수는 그 어떤 음료보다 좋다. 하지만 한 번씩은 어릴 때 마시던 보리차도 생각난다. 무미(無味)의 생수도 좋지만 시원한 보리차는 더할 나위 없다. 둘 다 갈증을 잘 풀어주지만 시원한 보리차를 생수가 이길 수 없다.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따뜻한 보리차가 커피보다 좋을 때도 있다. 보리차는 티백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제품이 많이 나와 있다.
티백으로 된 보리차는 만들기도 쉽다.
큰 냄비 가득 생수 2리터를 넣고, 보리차 티백을 넣고 끓이기만 하면 끝이다. 어릴 때 집에서 먹던 보리차는 엄마의 컨디션에 따라 미묘하게 풍미가 달라지곤 했지만, 티백 보리차는 균일한 맛을 낸다. 이런 점은 굉장히 편하지만, 한 번씩은 아날로그 감성이 그립기도 하다. 아무튼 끓이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냉장고에 들어가기까지의 공정이 남았다. 예전에는 델몬트병이 대세였다. 유리로 된 유니크한 디자인은 국민 보리차병이 되기에 충분했다. 마시기도 전에 손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느낌은 보리차의 청량감을 더했다.
우리 집은 2리터의 생수를 끓여, 2리터의 보리차로 만든다.
내가 한 번 끓여봤다. 생수 하나를 냄비에 붓고 보리차를 끓이는 것까지는 무난했다. 한소끔 식은 보리차를 다시 2리터 생수병에 넣는 것이 문제였다. 어떻게 붓느냐고 물으니, 아내는 알아서 잘해보라고 했다. 디자이너의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냄비를 통째로 들어서 조심조심 페트 입구에 가져다 기울였다. 결과는 뭐 당연히, 반 이상을 흘려버렸다. 뭔가 방법이 필요했다. 얼른 종이컵을 찾아서 한쪽 면을 접어 뾰족하게 만들어 일일이 보리차를 조심조심 퍼서 부었다. 엄청난 비효율의 극치였지만, 최소한 절반 정도는 건졌다. 매번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다이소로 달려갔다. 깔때기나 다른 뭔가가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깔때기, 깔때기를 찾았다.
예전에 등유를 넣을 때 쓰던 깔때기의 미니 주방 버전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매장을 뒤졌다. 어렵지 않게 작은 주방용 깔때기를 발견하고 상품을 집어 들었지만, 이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보였다. 자바라식으로 된 실리콘 깔때기가 보였다. 오, 잠깐만!!.
’쟈바라, じゃばら(蛇腹)‘는 뱀의 배를 뜻하는 일본어로 주름져서 접는 것 또는 방식을 말한다고 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우리말로 '주름식'정도를 추천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 사생실기대회에 나가면 주름을 접었다 펴는 물통을 자라바 물통이라고 한 기억이 났다. 깔때기는 생긴 모양이 절대 수납 비친화적이다. 그런데, 실리콘으로 된 주름식 깔때기라면 유레카다. 게다가 가격은 단돈 천 원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얼른 사들고 와서 생수통 입구에 꽂아봤다.
아주 그냥 딱 맞춤이다.
2리터짜리 빈 생수통은 중심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처음 몇 번은 왼손으로 통을 잡고 국자로 옮겨부었다. 넓은 국자로 대충 부어도 잘 들어갔다. 이후 반 정도가 차면, 나머지는 냄비째 부으면 된다. 이 작고 하찮은 천 원짜리 다이소 깔때기는 우리 집의 보리차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사각은 가로, 세로가 8cm이고 접으면 채 2cm 정도밖에 안 된다. 싱크대 서랍 내 수저통 옆에 두면, 납작하게 접힌 모양이 눈에 딱 보인다. 자리도 거의 차지하지 않는다. 사용 후 세척도 쉽다. 설거지 할 때는 세제로 살짝 씻어주고 흐르는 물로 슬쩍 헹구면 된다. 물기도 한 번 탈탈하고 털면, 깔끔해져서 바로 서랍 안에 넣을 수 있다.
다이소에는 참 신기하다.
천 원짜리 주름식 실리콘 깔때기 덕분에 우리 집 냉장고에는 늘 보리차가 있다. 물건 하나가 삶을 윤택하게 한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만약 보리차를 끓였는데, 계속 잘 쓰던 실리콘 깔때기가 싱크대 서랍에 없다! 보이지 않는다라고 생각해 보자. 게다가 아무리 찾아도 없다면, 종이컵을 찾거나 냄비를 통째로 들고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이 없다. 이런 고민할 시간에 바로 다이소로 달려가야 한다.
고민은 보리차를 늦출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