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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나무 Aug 13. 2024

내 운명을 사랑할 것이다.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지만 버티기 힘든 날도 있다. 한꺼번에 힘든 일이 찾아오면 나에게만 불행이 닥친다고 생각하게 된다. 마치 내가 비련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나처럼 박복하고 불행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상처와 불행에 주눅 들어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가장 가엾고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정말로 그렇게 된다. 생각만큼 우리를 쉽게 쓰러뜨리고 무너뜨리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던 일도 문제라고 인식하는 순간 진짜 문제가 되어버린다. 자신만 고통과 불행을 겪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게 되면 스스로를 좀먹고 갉아먹게 된다. 세상을 원망하고 신세한탄에 빠져 스스로를 세상과 고립시켜 회생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아름답고 눈부셔 보이는 누군가의 삶도 알고 보면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것일 수 있다. 그의 삶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자신의 불행과 슬픔마저도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를 보면 이런 우화가 등장한다. 어떤 한 남자가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면서 축복은 바라지도 않으니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과 바꿀 기회를 달라며 간절히 기도했다. 밤마다 너무도 절실히 기도했기에 신에게 가닿았고 신이 응답했다. 신은 사람들에게 각자 겪은 불행한 일들을 보자기에 싸서 사원 마당으로 가져오도록 했다. 각자 싸 온 보자기를 모두 펼쳐놓으라고 하고는 서로의 내용물을 살펴보고 각자 원하는 보따리를 선택하도록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보따리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다들 누가 자기 보따리를 가져갈까 두려워 서둘러 자신의 보따리를 챙겨갔다. 밤마다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과 바꾸게 해달라고 기도한 남자조차 다른 사람이 자신의 보따리를 가져갈까 봐 잽싸게 자기 보따리를 집어 들었다.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알기 전까진 타인의 삶은 평화로워 보이고 심지어 행복하기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사연 보따리를 풀어놓는 순간 나의 불행이나 슬픔은 오히려 작게 느껴진다. 타인의 고통을 내가 직접 겪으면 어떨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기에 더욱 두렵고 무서워진다. 차라리 나에게 익숙한 불행과 역경이 낫겠다 싶어 서둘러 자신의 불행을 되찾아 간 것일 테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멀리서 보는 타인의 인생은 멋지고 행복해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가진 불행에 진저리가 나고 벗어나고 싶어도 오히려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내 불행이 더 나을 수 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만이 아니라 나쁜 일까지 포함해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을 비련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 길이다. 살아있다면 누구라도 고난과 역경, 상처와 슬픔, 상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상처받고 아프다는 말이다. 자기 연민에 빠지면 누구나 겪는 시련과 아픔조차 자신만 감당해야 하고 겪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자기만 불행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 분노, 울분이 들끓는다.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면 부정적 감정으로 인해 정서가 안정되지 못해 몰입하거나 집중할 수 없게 된다. 불안정한 정서 상태에서는 무얼 해도 잘 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쉽지 않다. 잦은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다 보면 진짜 불행에 빠질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환경과 조건을 갖춘 사람은 없다. 누구라도 결핍이 있고 겪어내야 할 고통이 있다. 인내하고 감수해야 할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기 연민을 떨쳐내고 자신에게 일어난 나쁜 일까지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삶에서 발생하는 고통, 슬픔, 상실, 상처까지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 삶에서 마주치는 역경과 시련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단단하게 아물게 한다. 곡식도 잘 여물기 위해서는 강렬한 햇볕을 견뎌야 하고 병충해와 비바람을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좋은 품질의 곡식이 될 수 있다. 물론 성장하기 위해 일부러 고난과 역경을 맞닥뜨릴 필요는 없다. 시련 없이 살 수만 있다면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러나 살다 보면 좋은 날만 있는 건 아니다. 원하지 않아도 많은 어려움과 난관에 봉착한다. 나만 그렇다고 생각해 자기 연민에 빠지면 답이 없다. 곡식조차 좋은 품질로 자라기 위해서는 병충해와 비바람을 이겨내는 과정이 필요한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어떻겠는가?




 「맹자」의 '고자(告子)' 장(章)에는 "하늘이 장차 큰일을 맡길 사람에게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를 괴롭게 하고 몸을 굶주리게 한다. 그 자신을 궁핍하게 만들고 행하고자 하는 바를 어긋나게 한다. 그 이유는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라는 잘 알려진 구절이 나온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아무리 작은 성취라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배움과 성장이 있어야 한다. 알다시피 성장의 과정은 녹록지 않다. 오죽하면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는가. 나를 새로운 시작으로 이끌어주고 새로운 길로 인도해 줄 역경과 고난, 상실과 슬픔이 찾아오면 그 운명까지 사랑하려 노력할 것이다. 내가 다시 산다면 파멸로 몰고 가는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고난과 고통 앞에 좀 더 당당해질 것이다. 나를 힘겹게 하는 시련까지 운명으로 받아들이려 애쓸 것이다. 불어오는 운명의 바람에 저항하기보다 나를 맡기고 운명이 데려다주는 새로운 길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외려 생각보다 좋을지 모른다. 내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지평을 열어 주는 계기가 될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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