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기원전에 이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남겼다. 살면 살수록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내 안에 그렇게 많은 서러움이 있었는지 몰랐고 내 안에 그토록 상처받은 마음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저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채 방치하며 살았다. 속상한 일이 생길 때조차 나를 위로하기보다 오히려 더 질책하며 혹독한 비평가가 되어 책망하기 바빴다. 상처받은 내면과 악수하지 않고 세상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비난하고 힐책했다. 심장이 날카로운 칼에 찔려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데 그조차 모르고 윽박지르고 더 잘해야 한다고 채근만 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나 강제 휴식을 하게 되면서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상처받은 내면과 조우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나에 대해 아는 것임을 인생의 변곡점을 통과하며 알게 되었다.
우화 중에 '배가 터져 죽은 개구리' 이야기가 있다. 숲 속 동물들이 잡담을 나누다 갑자기 '누가 가장 큰가?'로 화제가 흘러갔다. 몸집이 큰 황소가 나서며 몸집 자랑을 하자 모여 있던 동물들은 크다며 감탄했다. 다음으로 코끼리가 자신의 몸집을 과시하자 여기저기서 크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구석에 있던 개구리가 폴짝 뛰어나오더니 자신도 저들만큼 크다며 배를 부풀렸다. 그러자 모여 있던 동물들은 어이가 없어 크게 웃었다. 개구리는 당황하여 자신의 배를 계속 부풀리다가 그만 배가 터져 죽고 말았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개구리는 자신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 결국 죽었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잘못하는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인지 아닌지를 알았더라면 죽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개구리는 황소나 코끼리에 비해 몸집은 작지만 분명 잘하는 것이 있다. 폴짝폴짝 잘 뛰어오르고 헤엄도 잘 친다. 황소나 코끼리는 몸집은 크지만 둔해서 잘 뛰어오르지 못하고 헤엄도 잘 치지 못한다. 개구리는 황소나 코끼리와는 다른 강점이 있었음에도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자신에게 없는 재능을 과시하려다 죽음을 맞이했다.
개구리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잘하는지 제대로 알았다면 숲 속 동물들의 조롱거리가 되지도 않았을뿐더러 허망한 죽음도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도로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자신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다. 우화에 등장한 동물들처럼 우리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세상에서 요구하는 대로 그 기준에 맞춰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타고난 잠재력은 펼쳐보지도 못하고 별 소질이 없는 것만 훈련하고 학습하게 된다. 개구리는 황소나 코끼리처럼 몸집이 큰 동물이 아닌데 황소나 코끼리처럼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결국 절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개구리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헤엄치기 능력에 의미를 두고 그 능력을 좀 더 개발했다면 황소나 코끼리는 개구리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개구리는 자신이 잘하는 것을 발견하고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외려 황소나 코끼리가 개구리를 부러워했을지 모를 일이다.
생계를 위해 수고롭고 고단하게 일해야 하는 것이 숙명이라면 이왕이면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 한다면 수고로움이 반감되고 보람과 의미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일에 있어서 나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아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의외로 자신이 정말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또한 자신이 싫어한다고 생각한 것을 의외로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주변의 시선과 기대를 의식하며 살아간다. 특히 부모님이나 롤 모델(role model) 같은 의미 있는 타자의 시선과 기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또한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를 내면화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인생을 살아가려는 사람도 많다. 우화에 등장하는 개구리도 다른 동물들의 경탄과 찬사를 받기 위해 자신을 망각하고 그 기준에 맞추려다 결국은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남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타자의 꿈을 좇아 살아서는 안 된다. 타인이 원하는 삶, 타인이 꿈꾸는 삶을 대신 사느라 정작 내가 살고 싶은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벌레만 봐도 무서워하고 개구리 해부조차 못 하는 사람이 공부 좀 잘한다는 이유로 주변의 권유에 따라 의대에 진학하면 앞날은 불 보듯 뻔할 것이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지금까지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들이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좋다고 생각한 것들이 사회화 과정을 통해 학습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르치는 일을 줄곧 했었다. 대학 시절,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가르쳤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라 착각했지만 아프면서 강제 휴식을 갖다 보니 보이지 않던 진실이 보였다. 나는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조차 속이고 주변 기대에 부응하느라 열심히 살았던 것뿐이었다. 수많은 학습자를 만나 소통하면 할수록 공허했고 에너지가 방전되고 기가 빨렸다. 극내향형인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자체만으로 버거웠고 힘겨웠다. 홀로 1남 3녀나 되는 자식을 키워낸 어머니의 염원에 부응하고 싶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오랜 기간 포기하지 못했다.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진짜 나에 대해 아는 것이다. 사회적 필터를 없애고 의미 있는 타자의 시선과 기대를 제거하고 '진짜 나'를 직시해야 한다.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진짜 내가 누구인지, 지금까지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온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자 기본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다시 산다면 타자의 꿈을 대신 사느라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악수하고 나를 보듬으려 애쓸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시선이나 기대와 무관하게 정말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 출발선은 나에 대해 아는 것이니 만큼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치열하게 탐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