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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나무 Aug 18. 2024

타인에게 관대해지려 노력할 것이다.

조윤제의 「다산의 마지막 습관」을 읽어 보면 "누구나 지옥을 걷고 있으니 타인에게 관대하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을 곱씹어 보면 흔히 타인은 멀쩡한 것 같고 심지어 천국만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실상은 그들도 나와 다를 것 없이 지옥을 함께 걷고 있는 동반자라는 말로 들린다. 겉으로는 누구나 상처받은 적 없고 고통이나 시련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나만큼 아프고 힘든 사람들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측은지심(心)이 절로 생긴다. 측은지심이란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나와는 너무 달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왜 저럴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고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나도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지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조차 실상은 나와 같이 지옥을 헤매고 있는 가엾은 동지일 뿐이다. 나와 잘 지내고 있는 사람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나와 코드가 맞거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잘 지내는 것일 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저마다 한계가 있고 흠결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과 만나고 사귀려거든 그들의 흠집이나 단점을 인정해야 한다. 타인의 실수를 품을 수 있어야 진정으로 타인과 만나고 교제할 수 있다. 성경에도 타인의 잘못에 대해선 관대해야 한다는 말씀이 나온다.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라고 예수께 묻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성경 말씀은 너무도 유명하다. 타인의 잘못에 대해선 끝까지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누구라도 흠 없고 죄 없는 자는 없다. 성경에 보면 율법학자들이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돌을 던져 죽여야 하는지 묻자 예수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자 아무도 돌을 던질 수 없었다. 누구라도 한계가 있고 죄가 있기에 돌을 던질 수 없었던 것이다. 뛰어난 사람은 자신은 물론 이러한 타인의 한계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타인에게 너그러워지고 관대해질 수밖에 없다.        



「유배지에서 보낸 정약용의 편지」를 읽어 보면 타인에게 관대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잘 드러난다. 내가 남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오만함이자 수양이 부족한 것이라고 보았다. 베풀되 보답을 바라서는 안 되며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이 역시 오만한 근성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했다. 힘들고 어려운 나를 외면하고 도와주지 않는다고 타인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섭섭한 마음을 가질 이유도 없다. 내가 보기에 그들이 더 풍족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그들이나 나나 모두 힘든 지옥을 걷고 있기는 매 한 가지이다. 내가 먼저 힘든 그들에게 베푼 것이 없는데 그들이 내게 베풀기를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도둑 심보다. 다산 정약용은 폐족의 신분이라 궁핍하고 힘들었지만 일가친척들의 도움을 바라진 않았다. 오히려 일가친척들에게 베풀기는 하되 보답을 바라지 말라고 자식들을 가르쳤다. 인간관계론의 대가 데일 카네기 역시 성경에 나오는 말씀인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을 인간관계의 황금률로 보고 강조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들에겐 필연적으로 타인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데일 카네기는 세상에는 많은 능력이 존재하지만 사람을 사귀고 친구로 만드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능력이라고 했다. 부러워 보이는 누군가도 나처럼 고통에 몸부림치며 지옥을 함께 걷는 처지이니 아무쪼록 타인에게 관대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생을 통해 찾아오는 고통의 총량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한다. 고통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누구라도 겪어야 할 고통의 양은 동일하다고 하니 얄밉고 싫기만 한 그 누군가도 나처럼 힘들게 살고 있을 공산이 크다. 나도 힘들지만 먼저 손 내밀고 먼저 베풀다 보면 조력자도 생기고 귀인도 만나고 친구도 만날 수 있게 된다. 내면에 상처받은 채로 웅크리고 타인이 먼저 손 내밀어주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타인에게 다가가는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지옥을 함께 걸어가고 있는 동지이기 때문에 그들의 날 선 말과 날카로운 행동에 상처받기보다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보듬어주고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상대도 나의 진심을 알아주고 무장해제되는 날이 찾아올지 모른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멀리 가지 못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을 혼자 가는 것보다는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구경도 하면서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간다면 더욱 행복하지 않겠는가. 외롭고 쓸쓸한 무채색의 삶보다는 다채로운 사람을 만나 교류하며 어울리는 컬러풀한 삶이 더 행복하고 즐겁지 않겠는가. 가장 상처 주고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도 사람이고 가장 큰 행복을 선사하는 것도 사람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혼자 살 수 없다. 숙명적으로 인간관계에 시달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람 없이 살 수 없고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아무쪼록 타인에게 관대해져야 한다. 내가 다시 산다면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타인을 용서하고 관대해지려 노력할 것이다. 그렇다고 바보처럼 이유 없이 호구로 보여서도 안 될 것이다. 호의가 지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처럼 기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에게까지  관대해질 필요는 없다. 때로는 나도 실수할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에 타인의 악의 없는 실수와 잘못에 너그러워지고 관대해지려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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