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죽마고우의 딸이 결혼을 했다. 30~40년 전 서로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친구들이 모였다. 삼십 년이 넘어서야 만난 친구가 인사를 하자 "어머, 누구시지요?"라고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당황스러운 대답 아닌 질문을 해버린 친구도 있었다. 세월이 서로를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휴대전화가 수시로 카메라 역할을 해서 거울처럼 일상을 담을 수 있다. 늘 보던 모습은 익숙해서 그 변화를 알아차리기 힘들다. 특히 본인의 얼굴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잘 모른다. 대신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모습을 보고서야 '내 모습도 내 친구들 눈에 저렇게 보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겉모습은 예전에 우리의 결혼식을 올렸을 적에 보았던 우리들의 부모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변했지만 속은 그때 그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 나는 유난히 '엄마'의 '엄'자를 입밖에 내놓지 못했었다. 결혼식 한 달 정도 앞에서부터 '엄마'를 입밖에 꺼내지 못했었고 생각만 해도 눈이 빨갛게 충혈되면서 홍수가 난 것처럼 눈물이 고였었다. 친구 딸의 결혼식날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친구들은 멀쩡한데 바보처럼 나만 계속 눈물바람이었다. "아이고, 자기 딸이 결혼을 하면 한강이 되겠네."라는 친구들의 놀림을 들으면서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벌써 그렇게 되었다. 친구 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삼십 년이 한 페이지였었고 우리들의 자녀가 결혼을 하면서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진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다.
햇볕이 찬란하게 초록 사이에서 빛나는 사월에 우리들의 자녀는 결혼을 하고 우리들은 삼십 년 전의 우리들의 부모님 모습을 하고 그 곁을 지키고 있다. 그 와중에 서로의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다. 병석에 계시는 본인의 부모님 걱정으로 친구의 부모님은 그냥 안녕하시리라는 짐작을 하고 살다가 우리 부모님과 다름없는 상황 속에 계시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 모습을 하고 서있고 한편으론 우리 부모님 걱정을 하고 있다. 자식과 본인 그리고 우리의 부모님은 대략 삼십 년이라는 시간의 텀 속에서 서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거울이 되고 있다.
너무나 선명해서 숙연해진다. 삼십 년 전의 우리의 모습은 우리의 자녀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삼십 년 후의 우리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부모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쉽게 읽을 수 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희로애락(喜怒哀樂) 이 두 개의 사자성어가 비 온 후의 대자연이 선명하게 보이듯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 같다. 각자의 삶이 많이 달라 보이지만 우리 모두의 삶이 몇 글자와 같은 모습을 하며 펼쳐진다.
예의를 갖춘다는 건 그래도 최선을 다해 성장을 하고 참여하는 것이라고 혼자만의 상식으로 이 계절에 맞는 옷차림을 하고 안 신던 고운 신발을 챙겨 신고 두 시간여동안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초행길을 찾아갔다. 식장을 막 들어서는데 뒤에서 "영미야!"라고 누군가가 불렀다. 그래도 그 친구는 자주(?) 봤던지라 반갑게 맞으며 들어갔다. 신부 부모님은 그런 모습이어야 된다는 표본처럼 하고 있는 친구 부부를 보고 인사를 하자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영미야!"라고 불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누구세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누구세요?"라고 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발가락 일곱 개가 풍선처럼 물집이 생기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긴긴 수다를 하면서 삼십 년 시간을 지워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물집이 터지고 아픔을 감지하면서 집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고 급기야 예의의 상징인 그 신발을 벗고 말았다. 터진 발가락을 소독하고 약을 바르면서 한 틀 속에 담은 사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