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뜯고 씹고 맛보고
현대인에게 한 끼는 먹는다기보다는 때우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정성스레 밥을 짓고 국과 찌개를 끓여내는 수고는 언제부터인가 밀키트와 새벽배송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다 보니 완성된 음식 이전의 식재료일 때의 상태와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을 알 길이 없다. 식사란 순식간에 흡입하고 다른 활동을 하기 위한 영양섭취일 뿐이다.
92세의 생신을 맞으신 할머니댁을 방문하였다. 할머니는 지금도 소일거리로(전혀 소일거리가 아니지만) 집 앞의 텃밭을 가꾸고 계셨다.
부추, 배추, 가지, 열무, 상추, 고추 등 정성스러운 할머니의 손길과 땀이 배어있는 이 탐스러운 작물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과 생명력에 마음이 충만해진다. 따먹는 재미와 골라먹는 사치를 부려가며 텃밭 이곳저곳을 기울이다 보면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된 마음이 든다. 마음대로 꺾고, 뽑고, 뜯으며 소비의 쾌락을 느껴본다. 여기서는 아끼고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것이 돈 버는 일.
마트에서 돈계산을 해가며 이것을 고르는 대신 저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두 손 가득한
먹거리를 바구니에 잔뜩 집어넣고 나니...
이런 게 부자의 삶이 아닐까
부자의 삶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풍요롭게 한다.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상추를 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물질에 대한 욕심은 사라지고 내면의 평화가 찾아온다. 마음 테라피가 따로 없다.
"애야, 상추는 겉잎부터 차례로 뜯어라,
가지는 큰 것부터 꺾어라,
파는 뽑은 뒤 이파리는 벗겨서 가져가거라."
수확은 단순 요리를 위한 노동이 아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도구다. 가족과 지극히 자연친화적인 행동을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감성적인 위로와 함께 마음의 평온함이 찾아온다.
바쁘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시간을 벗 삼아 반복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의 이 완벽한 균형과 조화로움이란.
물질과 마음의 평화, 이보다 더 완벽한 삶이 또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세상 최고 부자의 삶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