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감상실의 추억
인스타 새 글 알람이 떴다
Fire house계정 신곡 알림이었다.
1990년에 데뷔한 미국의 글램메탈, 락발라드 메탈그룹 좋아했던 그룹이었다. 보컬의 목소리와 곡에 반했었다. 보컬은 작년에 대장암 투병을 이겨내고, 올해 복귀하기로 되어있었다는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걸 계정을 보고 알게 되었다.
20살의 나는 우연히 본조비의 메탈발라드를 접하게 됐고, 점차적으로 데쓰 메탈까지 듣게 되었다.
아마 내수중에 돈이 있었다면 많은 lp들을 사는데 썼을지도 모른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레코드점에서 일정 금액을 받고, 좋아하는 곡을 적어가면 녹음해 주는 서비스가 있었다. 최애곡들만 들어있는 테이프는 늘어날 때까지 듣곤 했다.
나와 같은 세대라면, 좋아하던 라디오프로 DJ들도 있었을 것이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별이 빛나는 밤에 등 전화연결 한번 해보겠다고 전화기다이얼을 돌려봤고, 엽서를 치장해서 보내기도 했었다.
거리에 음악리어카에서 주야장천 나오던 곡들은 가요순위프로에 1등 하는 곡이 되곤 했다. 비싼 테이프대신 리믹스리어카 테이프를 사서 듣기도 했다.
스무 살의 나의 지갑엔 지폐가 몇 장 없었다. 한 달 용돈이 5만 원이나 되었을까?
학원비도 부모님께서 충당해주고 있을 때라 넉넉하지 못한 지갑을 들고 특별히 갈 수 있던 곳도 없었다.
그 당시 동인천신포동이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인천의 명동 같은 거리였다.
대한서림이 약속장소였고 넉넉하지 않은 이십 대들은 자유공원을 오르고 저렴 한 삼치 골목에서 막걸리 한잔에 삼치구이하나로 줄인 배를 채우기도 했다.
그때 우연히 음악감상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음악을 좋아한다 얘기하던 젊은이들은 거의 여기 모여 있었을 것도 같다.
대표적으로 심지음악감상실, 나중에 생긴 유진음악감상실이 있었고, 입장료는 1000원이었으며 2000원으로 올랐던 거 같다. 어두운 음악감상실 안에 들어가면 꿉꿉한 향이 나면서, 큰 스크린이 보였고 화면으론 신청곡으로 접수된 곡의 뮤직비디오가 고막을 쩌렁하게 울리고 있었고, 디제이박스 안에 어슴프레 비치는 디제이들이 곡설명과 어떤 멘트를 하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의자에 앉아 몇 시간이 지나도록 음악을 듣고 들어도 지루하지 않았었다.
♡lp음악카페 아바 심지음악실 디제이를 하셨었으며 지금도 lp카페를 운영 중이신 분 글 중 좋아하던 곡들소개가 있어 링크 걸어봅니다.
나의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내향적인 나에게 자유분방한 록스피릿은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있구나 하는 걸 알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일렉기타, 베이스, 드럼연주는 심장을 요동치게 했고, 보컬들의 성량은 절로 감탄이 나오게헸다.
이십 대 초반이던 나는 지금 배우고 있는 길이 내게 맞는 길인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고뇌와 두려움이 있었고
집안문제까지 더해져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엄마아빠의 싸움이 있었던 날이거나, 집에서 뛰쳐나오고 싶었을 때 나에겐 갈 곳이 있었다.
갈 곳이 있다는 건 마음을 얼마나 놓이게 하는 것인지... 집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이나 가야 있던 그곳, 컴컴해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고, 오래 있는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었고, 음악하나로 복잡한 머릿속이 잠시나마 깨끗이 리셋이 되는 기분이었다.
두 군대, 음악감상실 중 먼저 성업을 이루었던 심지음악실 은 늘 사람이 북적여서 어느 날은 자리가 없었기에, 새로 개업한 유진음악감상실로 아지트를 옮겼었다.
스무 살 인생, 첫사랑이자 짝사랑 디제이오빠를 알게 된 곳도 그곳이었다.
오빠는 나보다 한살이 많았던 21살 큰 키에 말랐으며, 얼굴은 내보기엔 미소년 상이 었다. 신청곡박스에 신청곡메모지를 넣으며 초콜릿 하나씩을 같이 넣었었다.
그렇게 나는 수줍지만 오빠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조금은 친해졌나 싶었지만, 좋아한다는 고백에도 마음을 받아주진 않은 건지, 오빠의 입대와 함께 그저 아는 오빠동생이 되었던 듯싶다. 군대에 간 오빠에게 나는 위문편지를 가장한 편지를 계속 보냈었고, 심심해서일까 답장을 쭉 보내줬던 오빠의 편지는 낡아빠진 박스 안에 아직도 고이 남아있다.
그 당시 우리 집 거실엔 어마어마 큰 인켈 오디오가 있었다. 엄마는 아침에 마음수양을 한다고 불경을 틀어놓았고, 아빠는 트로트를 틀었고, 종종 언니가 올드팝을 틀어놓곤 했지만, 오디오를 가장 사랑하고 자주 듣던 건 나였다. 언니가 지방대를 가고 언니가 쓰던 방에 나만의 오디오를 들여야겠단 결심을 하고 학원방학 때 공장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당시 시급이 기억으론 800원쯤 됐던 것 같다. 나는 잔업까지 풀로 뛰고 40여만 원의 아르바이트비를 받았다. 내돈내산 태어나 첨으로 26만 원짜리 오디오를 구매하곤, 어찌나 행복하고 좋았던지, 무언가를 사고 그때처럼 기뻤던 적은 아직까지 없는 것 같다. 내 방에 내 오디오라니...
이혼 후 친정집에 돌아간 얼마 후 집에 빨간딱지가 붙어 큰 물건들을 처분해야 했을 때도 오디오 턴테이블 만은 고수하고 챙겼었다.
내가 샀던 오디오는 분리형이 아니었어서 거실에 있던 오디오 텐테이블만 떼어왔다.
지금도 내 방에 떡하니 있다.
오랜 친구와 가끔 우리들만의 아지트 이야기를 한다.
허리를 굽히고 올라가야 했던 다락방 같은 커피숍과 쫄면에 만두를 칼국수를 먹던 허름했던 분식집, 9시 전에 귀가해야 돼서 4시 문 열자마다 안주하나 시켜 소주와 콜라를 타서 마시던 작은 술집
누구에게나 그시절 위안과 행복을 주던 자신만의 아지트가 있었을것이다.
그때 그시절 나의 감성을 촉촉하게 해주고 힘들었던 마음을 위로해주던
음악감상실
추억에 젖어 오늘도 lp한장을 꺼내 들어본다.
새로운것에 대한 갈망보다 옛것들이 주는 편안함이 좋은 나이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