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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현진 Nov 24. 2022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오래오래 함께 하자

현진이의 일기




엄마의 일기


며칠 전 본 '금쪽같은 내 새끼'의 아이들 모습이 여전히 문득문득 머릿속을 스친다. 엄마 잃은 아이들의 얼굴엔 시시때때로 슬픔이 머물렀고, 나는 그 아이들을 바라보며 한 시간 내내 진이 빠질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아직 겪어보지 못한 가족의 부재, 상상하는 것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얼마나 슬플까, 얼마나 그리울까, 얼마나 두려울까.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씩씩하게 살아내는 텔레비전 속 예쁜 아이들과 아빠를 마음 깊이 응원하게 된다.


그리고 문득, 생각하기 싫지만, 나의 부재 또한 상상해보게 되었다. 내가 아프다면, 그래서 나에게 남은 날이 얼마 없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덜 후회하며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을까. 죽음은 누구에게든 갑작스레 찾아올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오늘 무엇을 해야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는 마지막 순간 후회로만 가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 오후 현진이의 공부를 가르치다 집중하지 않는다며 혼을 낸 기억이 자꾸만 맴돈다. 저녁을 먹을 때 바른 자세로 앉아서 먹지 않는다며 타박한 기억도 떠오른다. 조금 더 놀다 자고 싶다는 아이를 늦었다며 서둘러 아빠와 방에 들여보낼 때의 아쉬움 가득한 뒷모습도 아른거린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었다면, 나는 현진이에게 수없이 미안하다고 외치며 눈을 감았겠지.




현진이는 나와 하루에 30분~1시간가량씩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학 직전의 일곱 살 아이에게 필요해 보이는 워크북 몇 가지를 구매해 함께 하고 있는데, 왜 아무리 훌륭한 선생님이라도 내 자식은 못 가르치는 법이라고 하는지를 여실히 깨닫고 있다. 속에서는 수시로 천불이 나고, 천불을 겨우겨우 식혀내는 내가 공부하는 현진이보다 더 대견할 지경이다.


특히 함께 수학 공부를 하는 순간  좀 버겁다. 일단, 수학으로는 꽤나 날렸던 똑똑한 아빠를 두고 일명 수포자인 엄마가 수학을 가르치는 상황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이 전혀 없다. 퇴근하고 함께 놀기 바쁜 아빠와 공부하라고 하는 건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억지로 수알못 엄마가 이끌고 있지만, 일찌감치 수학을 포기했던 내가 아들의 수학을 봐주고 있는 상황이 스스로도 선뜻 납득할 수가 없다. 게다가 나는 숫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나도 싫고 잘 모르는 걸 어찌어찌 애써가며 함께 하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현진이가 대충 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게 그렇게 화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특히 현진의 수학을 봐줄 때면 나는 차마 밖으로 분출할 수 없는 열이 자주 들끓어 오른다.


그나마 웃으며 잘 가르칠 수 있는 건 영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유일하게 좋아했던 과목이 영어였고, 수학과는 달리 영어는 억지로 하기 싫은 마음을 질질 끌고 힘겹게 공부한 기억이 없다. 그래서 아이들과도 즐겁게 영어를 공부하다 보면 어린 시절의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영어를 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영어공부의 일환으로 현진이는 나와 영어동화책을 하루에  권씩 꼬박꼬박 읽고 있는데, 얼마 전부터 재미를 더하기 위해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이 한 페이지 읽는 게임 형식을 추가했다. 현진이는 결과에 잘 승복하고 어려운 문장이 나와도 더듬더듬 나의 도움을 받아가며 열심히 책을 읽는다. 특히 오늘처럼 좋아하는 PJ MASK 책을 읽을 때면 성대모사까지 맛깔나게 해 가며 읽는다. 집에 있는 영어책들을 모두 혼자서도 잘 읽게 되면 더 어려운 책을 사서 읽어보자는 말도 현진이가 먼저 꺼냈다. 수학과는 달리 영어는 나랑 꽤나 재미있게 공부를 하는 중이다.


반면, 도저히 수학을 좋아할 수 없는 엄마는 수학을 가르칠 때마다 영어를 가르칠 때와는 영 딴판인 마음이 된다. 그래서 목소리가 커지고 자꾸만 무서운 얼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그렇다. 일곱 살에게 수학 문제 하나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무서운 얼굴로 집중해서 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다 너를 위한 일이야'라는 명목으로 내가 만들어내 버린, 오늘이 마지막 남은 하루였다면 가장 후회했을 순간이었다. 나의 무서운 말투가 본인을 위한 것이라고, 엄마의 다그침은 나를 위한 것이었으리라고, 현진이가 과연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현진이가 다른 학습지나 학원 대신 엄마를 선택했던 것은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아서였을텐데, 나는 현진이가 아닌 현진이의 공부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이만큼을 살고 보니 인생에서 공부는 정말 중요하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닐지언정, 공부를 잘하면 갈 수 있는 길이 넓어지고 또한 편안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진이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하는 학창 시절을 보내면 좋겠다. 그래서 현진이의 학습이 나에게 주어진 동안만큼은 현진이를 잘 이끌고 싶다. 더 잘 해낼 수 있는 아이를 괜히 내가 발목 잡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을 갖지 않기 위해, 나는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함께 할 수 있는 지금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께 하는 시간이 아닌 오늘 해야만 하는 공부에만 몰두해, 무서운 얼굴로 엄한 말투로 현진이를 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미안했다. 현진에게 많이 미안해졌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더 많이 안아줄걸,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줄걸, 더 많이 웃어주고 더 많이 이야기할걸 그랬어, 나의 마지막이 후회뿐이라면 아마 런 후회들일 테다. 한 문제라도 더 같이 풀 걸 그랬어, 딱 그 문제까지만 잘 알려줄 걸 그랬어, 런 생각 따위가 아니라. 일부터는 꼭 잘 해내고 싶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더 많이 안아주고 사랑해주고 웃어주고 싶다. 수학을 가르치는 순간이 그다지 재미있지 않더라도, 현진이가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선택한 이 순간들을 뿌듯하게 보내고 싶다. 내일부터는 나의 무서운 얼굴이 영영 사라질 거란 보장은 그럼에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글을 쓰며 다시 한번 굳은 다짐을 해본다.


현진아.

우리 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하지만 아주 오래오래 긴 세월 함께 하자,

많이 많이 웃고 사랑하고 안아주며 함께 하자.

엄마가 꼭 그래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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