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TS Mar 23. 2024

2th. 삼남에 내리는 눈 – 황동규

처음으로 끝까지 읽어낸 시집은 누구에게든지 의미가 된다.

[나를 키운 팔할의 책]


 # 2. 삼남에 내리는 눈 –황동규         


어느 새 30년 전이다. 나는 사춘기 때 어떤 여학생을 아주 깊이 좋아했었다. 중2에서 중3이 되는 시점에 교회에서 한 여학생을 봤다. 그 때부터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아이를 개인적으로 그녀석이라고 지칭했었다. 그녀석이 너무도 좋아서, 그녀석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할 수가 없었었다. 문제는 중2의 나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힘없고 찌질한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녀석에게 멋져보일 수 있는 일들은 다 흉내내어 봤었다.     


단적인 예로 당시 교회에 선후배가 다 같이 모여서 공부하는 공부방이 있었는데, 그녀석이 내게 수학문제를 물어본 날이 있었다. 그 때 문제가 어렵기도 하고, 긴장하기도 해서 답을 못해줬는데, 옆에 있던 한 살 많은 형이 가뿐하게 그 문제를 풀어서 설명해 주는 것을 보고, 그 선배를 이기고자 죽어라고 수학공부를 했었다. 뭐, 그 선배(그 선배 서울대 자연과학대에 들어가더니, 결국 서울대 의전원에 갔다)가 천재라 이길 수는 없었지만, 그 선배와 감히 견주려고 공부를 한 덕택에 초라한 내 성적이 쭉쭉 오르기는 했다.     


그녀석을 15살 겨울 때부터 22살 겨울 때까지 좋아했었다. 대략 따져보니 7년 정도 된다. 문제는 그 기간 동안 제대로 고백해 본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2 때의 왕따 사건이 남긴 흔적 때문인지, 나는 내 자신이 너무도 싫었고, 조금 더 나은 모습이 되어서 제대로 고백하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만사가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닌지라, 고백도 못하고, 흐지부지 내 첫사랑은 끝이 났다. 아마 그때부터 내 연애사에 암울한 기운이 가득했던 것이다.     


잡설이 너무 길었다. 책이야기와 연관지어 보자면, 그녀석이 너무 좋은데, 말로는 떨려서 도저히 마음을 전할 수가 없어서 편지를 썼었다. 그녀석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책을 읽을 때마다 그녀석에게 들려주고 싶은 글귀들을 옮겨 담는 습관이 생겼었다. 그러다가 시가 얼마나 찌릿찌릿한 것인지를 느끼게 되었는데.... 내가 그녀석 때문에 제일먼저 외웠던 시는 예이츠의 “하늘의 융단”이라는 시였고, 두 번째 시가 문제집을 풀다가 발견했던 “즐거운 편지1”이었다. 이 시가 너무 좋아서 외운 후에, 가슴의 두근거림이 진정되지 않아서, 이 시가 담겨있던 [三南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집을 구입하였다. [三南에 내리는 눈]은 내 인생 최초로 내가 구입한 시집이자, 내가 최초로 다 읽어낸 시집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三南에 내리는 눈]에 담겨져 있는 다른 시들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즐거운 편지를 제외한 다른 시들은 그저 읽어보았다는 선에서만 끝이 났었는데... 내가 수능을 치렀던 해는 수능 역사상 최악의 불수능이었다. 바로 97수능이었는데, 그때 언어영역도 극악의 난이도였다. 아주 힘겹게 문제를 풀고 있던 중에, 시 지문을 보게 되었는데, 즐거운 편지 1,2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즐거운 편지”라는 시를 황동규 시인보다 더 많이 읽고, 쓰고, 읊조려왔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외운 시가 수능에 출제되니, 마치 이번 시험을 잘 볼 거라는 신의 음성을 듣는 듯 했다. 그래서 쫄지 않고, 시험에 임했고, 그 어려운 시험에서 전국 최최상위의 점수를 받기는 했다.    

 

[三南에 내리는 눈]은 내 첫사랑을 바로 치환하는 회상의 매개체가 된다. 지금도 이 책의 표지만 보면, 그녀석의 얼굴이 그대로 떠오른다.  [三南에 내리는 눈]은 내가 시를 사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시집이자,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깨달음을 준, 나의 첫사랑이다. 처음으로 끝까지 읽어낸 시집은 누구에게든지 의미가 된다.     

     

[三南에 내리는 눈]에서...     

즐거운 편지

I. 내 그대를 사랑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II.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이전 02화 1th. 부활 -톨스토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