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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S Mar 27. 2024

3rd. 천국의 열쇠 -A.J 크로닌

말 뿐인 믿음의 시대에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나를 키운 팔할의 책]     #3. 천국의 열쇠 A. J 크로닌    


  군대에서의 생활이 편하고 좋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싶지만, 입대와 동시에, 군대와 내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훈련의 힘듦만은 아니었다. 그냥 그 억압된 분위기 자체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군대를 통하여 내가 얼마나 속박을 싫어하는지, 나의 경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놀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유흥을 좋아하지 않는다. 술집과 도서관 중에서 택하라고 하면, 도서관이 좋다. 막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이미 정해둔 규칙대로 사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그래서 신교대부터 너무도 괴로웠다.      


  입대하고 신교대에서 맞이한 첫 일요일에 종교행사에 갈 수 있었다. 종교행사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 이렇게 3개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당연히 기독교에 갔다. 그런데 신교대에서의 예배가 콘서트와 같았다. 찬양 인도는 외부 교회 사역팀에서 와서 했는데, 찬양팀에 여성단원이 있다 보니, 이 여성단원을 보기 위해 훈련병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흥겨운 분위기였지만, 나는 전혀 흥겹지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에 지나서, 다시 종교행사를 가야할 때, 나는 교회가 아니라 성당을 가는 것을 택하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참여하는 천주교 예식이 어색했지만, 조용하고, 생각할 수 있는 분위기가 좋았다. 미사를 마시고, 훈련소 내무반으로 돌아왔을 때, 기독교 예배를 다녀온 옆의 전우가 시비를 걸었다. 왜 교회가 아니라, 천주교를 갔냐고... 이 복잡한 심정을 설명할 수 없어서 머뭇거렸더니, 그가 차갑게 말했다. 부끄러운줄 알아라. 천주교 간식이 그렇게 좋았냐, 그렇게 함부로 신앙을 파는 거 아니다. 어디가서 신앙인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는 모태신앙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두 분이 다 일터로 가시면, 어머니가 돌아와서 밖에서 잠긴 문을 열어줄 때까지 동생과 방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7살 무렵에는 곤로를 사용해,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었고, 부모님도 일을 하러 나가실 때, 문을 잠그지 않으셨다. 친구들이 유치원에 가있기 때문에 심심했던 나는, 평일에도 동생을 데리고 교회에 갈 때가 많았다. 그곳에서 놀았고, 집사님들이 밥을 주시면, 교회에서 밥을 먹었다. 교회는 어른들이 고향에 대해 느끼는 감정처럼 내게 너무도 그립고, 편안한 곳이기에, 교회에서 배운 것은 내 삶에 있어서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천주교와의 관계가 애매하게 느껴질 때가 제법 있었다. 천주교와 기독교를 철저하게 구분하고, 천주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단언하는 이야기들도 여러 번 들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형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천주교 신자는 나와 같은 신앙을 지니고 있는 동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생각을 해보니, 치셤 신부님의 영향 때문이었다. 나는 치셤 신부를 깊이 존경하고, 그의 모든 것을 닮고 싶었다.      


  프란시스 치셤. 그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 [천국의 열쇠]라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진실을 끝까지 추구하는 삶에서, 전율을 느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은 서사의 핵심이 재미이며, 훌륭한 이야기꾼은 서사를 어떻게 전달하는지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천국의 열쇠]의 내용은 단순하지가 않지만, 노 신부가 된 프란시스 치셤이, 왜 그러한 삶을 살았는가를 과거의 경험 가운데에서 파악하는 형태로 소설을 읽는다면, 충분히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 안에는 너무도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하나의 책갈피처럼 읽은 사람에게 간직되어 있다가, 순간 순간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상황에서 하나씩 떠오르게 만들 것이다. 신교와 구교로 서로 종교가 다른 치션의 부모가 서로를 깊이 사랑하면서 함께 급류에 휩쓸리는 장면이라든가, 첫사랑인 로라의 죽음 이후 신학교를 무작정 뛰쳐나와 계속 걸었다는 치셤의 모습, 염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중국 유지의 아들을 치료하는 장면, 친구 탈록의 임종을 앞두고, 오열하는 치셤의 모습 등등이 나의 뇌리에 박혔다.    

  

종교라는 이름 안에 참으로 많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스펙트럼이 간혹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그럴 때는 나침반이 필요하다. 나는 [천국의 열쇠]라는 좋은 나침반을 만났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 이 책 덕택에 나는 나와 종교 다른 훌륭한 성품의 친구들을 만나는데, 망설임이 없어졌다. 사람에게는 성품이 중요하다. 신앙심은 그 다음이다. 나는 프란치스 치셤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가 걸어갔던 고난의 길을 흉내라도 내보고 싶다.      


  "종교의 옳고 그름은 거기 몸담은 자의 생활을 보면 제일 잘 알 수 있어요. 신부님, ... 당신은 당신의 모범으로 저를 정복하셨습니다."       


[천국의 열쇠]에서...     

*  “치셤군, 일기를 한번 써보게. 써서 출판하라는 게 아니야... 일기를 통하여 양심의 정체를 규명해보라는 것이지. 자네는 일종의 정신적인 고집 때문에 지독한 고민을 하고 있네. 속마음을 기록해낼 수 있다면 그 고민은 상당한 정도까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네.”

  “그냥 쓰라고 하면 쓰지 않을 거 같아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타란트 신부님”

  “자네에게서는 영적인 반골 냄새가 나거든...”   

  

* 같은 하느님을 제각기 서로 다른 방법으로 예배한다 해서, 왜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에게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수수께끼였다.      


* “왜 신부님들은 우리 중국으로 오신다지요? 귀국에는 이제 신부님들이 회개시킬 사악한 인간이 없어진 것인가요? 우리 중국에는 사악한 인간이 없는데, 이상한일이 아닌가요? 우리에게는 우리의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신네들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신들이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여기에 계셨던 신부님은 조를 불러서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듭니다. 맨살 가릴 옷감을 주고 배만 채워주면 무슨 노래라도 부를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먹을 것을 주어서 기독교인으로 만듭니다. 신부님께서도 이러실 건가요?”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요?”

이상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흘렀다. 시선을 맞추고 있다가 파오 씨의 종제가 먼저 눈길을 내리깔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내가 신부님을 오해했습니다. 신부님은 좋은 분이신 것 같습니다.”     


* 지옥이라는 곳은 말일세. 인간이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거라네.     


* 당신의 정의(定義)대로 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자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7일 중에 하루만 교회에 나가고 나머지 6일은 거짓말도 하고, 중상모략으로 남을 속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겁니까?     


* “신학자에게 개체주의적 성향은 위험한 것입니다. 종교 개혁은 개체주의에서생겨난 것이니까요. 타란트 신부가 퉁명스럽게 참견했다. 맥냅 신부는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 종교 개혁이 우리 카톨릭 교회를 카톨릭 교회답게 만들었지요.”     


* “치셤 신부, 요즘 나는 우리 메더디스트 파의 위대한 신학자인 애들러 커밍스 박사라는 분의 설교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먼저 타기해야 할 죄악은 바로 음험하고 악마적인 사제들의 음모로 발전하는 로마 카톨릭이다’이런 말을 합니다. 치셤 신부, 나는 당신을 사귀는 영광을 누린 이래로 커밍스 목사가 실언을 했다고 생각하게 된 바, 오늘 이 사실을 당신에게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치셤 신부는 피스코 목사의 이 일격에 웃고 돌아서서 선교관에 도착하는 대로 신학 서적을 펴고 연구를 거듭, 열흘 뒤 피스크 목사를 만나자 정중하게 반격을 했다.

  “피스크 목사, 요즘 나는 쿠에스타 추기경의 교리서를 읽고 있습니다. 이 교리서를 보면, 이런 구절이 분명하게 박혀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인간을 타락시키며, 사호를 위태롭게 하는 부독덕한 교파다....’ 피스크 목사, 나는 당신을 사귀는 영광을 누리기 이전부터 쿠에스트 추기경이 개소리를 한 것으로 생각했던 바, 오늘 이 사실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 왜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기독교인답게 살지 못한다면 기독교를 백날 가르치면 뭘해요?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에 계셨다면 분명히 외투를 벗어 주셨겠지요? 그런데 나는 왜 벗어 주면 안된다는 것입니까?

"종교의 옳고 그름은 거기 몸담은 자의 생활을 보면 제일 잘 알 수 있어요. 신부님, ... 당신은 당신의 모범으로 저를 정복하셨습니다."      


* 관용은 가장 귀한 미덕입니다. 겸손은 그 다음입니다.      


* 오, 주님 저 노인에게서 배울 수 있게 하소서. 아, 사랑하는 주님, 남들을 지겹게 하는 인간이 되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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