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될 생각이 없었다. 대학생활 1학년 때에 이어 군복무를 하면서 사람에 대한 공포와 실망이 너무도 커졌다.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글을 쓰기 위해 국어교육과에 입학했지만, 24살이 되어 복학을 했을 때, 머릿속에 선생의 길은 없었다. 공부는 심리학과에서 하고, 생활은 유도부에서 하면서, 국어교육과에서는 철저하게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사대이기 때문에 졸업을 위해 어떨 수 없이 교생실습을 다녀와야 했다. 공부를 진짜 못하는 중2병 걸린 남중 2학년 아이들을 담당하게 되었고, 지도 선생님은 이때를 기회로 자체휴가를 누리셨다. 교생실습 3일차부터 모든 수업과 조회, 종례를 담당했고, 수업만 70시간 정도를 했다. 아이들은 나를 교생이 아니라, 담임으로 대했다. 함께 교생실습을 나온 친구들이 날로 초췌해지는 나를 걱정해 주었는데, 신기한 건 별로 짜증나지 않고, 오히려 재밌었다.
교생실습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국정원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공부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고민 후에 다시 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임용시험은 가뿐하게 떨어졌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대원외고에서 첫기간제 교사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과분하게도 대원외고에서 아이들이 참 많이 나를 좋아해주었다. 교생 때와 교직 첫1년의 생활이 너무도 행복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교만해졌다.
정신여고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첫 3개월이 꿈처럼 지나갔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여고의 미혼선생님이라는 위치에 놓여보니, 내가 뭐라고 여기저기서 환호가 있었다. 그렇게 인기에 취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글로써 꼰대짓을 했다. 그런데 거기에 썼던 몇 개의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거 같다. 그래서 악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정도가 심해졌다. 처음에는 학교 외부 사람인줄 알았었는데, 매일매일 수업에서 있었던 일들이 희화되는 것을 보며, 수업을 듣는 학생임을 알게 되었다.
고심 끝에 블로그를 폐쇄했고, 그 이후로 아주 한참동안 블로그를 안했다. 만약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했으면, 교육관련 파워블로거가 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일 이후로 내게 후유증이 생겼다. 수업을 들어갈 때마다, 혹시 이 수업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 그렇게 나를 비웃는 친구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춘기 시절에 느꼈던 배척당하는 공포가 다시 나를 엄습했다. 매 순간이 괴로웠다.
그 이후로 안전한 수업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수업과 나를 격리시키고, 내 감정과 생각을 수업에 섞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강의를 하려고 했다. 당시에 나는 수업과 학교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잔뜩 날이 서서 행동이 불안정했다. 어떨 때는 한없이 너그럽다가, 어느 때는 과도하게 화를 내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정색으로 아이들을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나는 수업이 무서웠고, 학교가 재미없었다. 그때 이 책을 만났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는 일반적인 교육관련 서적과 달랐다. 이 책에는 수업방법론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었다. 이 책은 어떻게 가르칠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담겨 있었다. 물론 수업방법론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 또한 그것에 거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야기했다. “가르침은 하나의 테크닉으로 격하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이후로 내 교직생활의 신념이 되어 주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수업과 나를 분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국어라는 교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어와 함께 나라는 사람을 이야기 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나는 너무도 결점이 많은 사람이어서, 숨기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렇게 숨고 싶을 때마다 이 책을 잃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아이들 앞에 서는 것이 무서워졌을 때, 이 책을 꺼내서 다시 읽었다. 2년 전, 동료 교사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꼬리표를 달고, 중간에 교체된 담임으로 아이들 앞에 서야 했을 때도 첫조회를 하기 전에 [가르칠 수 있는 용기]를 다시 읽었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방랑을 끝내고, 귀국했을 때, 가장 먼저 읽을 책도 [가르칠 수 있는 용기]일 것이다. 다시 아이들 앞에 서기 위해서...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서..
* 가르침은 자신의 영혼에 거울을 들이 대는 일이며 자신을 안다는 것은 훌륭한 가르침의 필수사항이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 그것은 곧 나 자신에게로 달려가는 용기이다.
* 문제에서 빠져 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문제를 보다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 가르침은 마음에 감동을 주고 마음을 열게 하며 심지어 마음을 깨뜨리기까지 한다. 교사가 가르침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것은 가슴 아픈 작업이 된다. 가르침의 용기는, 마음이 수용 한도보다 더 수용하도록 요구당하는 그 순간에도 마음을 열어놓는 용기이다.
* 나쁜 선생은 그들이 가르치는 과목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로부터 멀어진다. 반면 좋은 선생은 자신의 자아, 학과, 학생을 생명의 그물 속으로 한데 촘촘히 엮어 들인다.
* 나는 때때로 지위나 역할이라는 간판 뒤에다 나의 자아의식을 감추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동료, 학생, 새로운 생각들로부터 우리가 부닥치게 될 것이 확실한 충돌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진다. 만약 내가 그런 유혹에 굴복한다면 나의 정체성과 성실성은 위축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르치려는 용기를 잃게 될 것이다.
* 인간 세상의 구원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 반성하는 인간의 능력, 인간의 온유함, 인간의 책임의식에 깃들어 있다.
* 가르침이라고 하는 드라마는 교실에서 벌어지는 외적 사건에 대한 나의 반응과 나의 내면에서 진행되는 무능력 사이의 갈등,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