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생인데, 수시에서는 생명과학보다는 물리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한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수시하고 정시를 동시에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정시에서 생명과학을 선택하지 않고 물리를 선택하면 될까요?
지난 글에서 수시에서 과목을 선택할 때, 이과라면 물리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입시적으로 과목 선택은 나의 흥미보다는 상대적 유리함이 되어야 합니다. 이과라면, 자연계 최상위권 학생들이 선택하는 의예과의 정형화된 루트를 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물리를 주력 과목으로 선택해서 내신이 최상위 성적이 나온다면, 생명과학 공부를 심화단계로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수시로 의대를 가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의대가 아닌 다른 전공으로 학과로 변경해야 할 때는, 물리를 주력 과목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생명과학을 주력 과목으로 공부한 학생보다 입시적으로 훨씬 유리해집니다.
그런데 효율을 중요시하는 친구들이 정시에 새로운 과목을 선택해서 공부하는 것보다 수시를 준비하면서 공부했던 과목을 선택해서 수능을 보겠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는 학생 개인의 역량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수시와 정시는 완전히 다른 메커니즘이기에, 서로 별개의 시험으로 인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수시를 위한 공부를 했다고, 그것을 정시와 연결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은 일이 됩니다.
고3 학생들을 면담했을 때, 이야기의 한 단면입니다.
"왜 그 과목을 선택했어?"
"일단 제가 그쪽으로 진로를 정했구요."
"그렇구나. 그것만이야?"
"또, 고3 때 내신으로 할 과목이어서, 겨울방학 때 선행으로 공부했 거든요. 공부한 게 아깝잖아요?"
"아, 그래? 지금 성적은?"
"아직 완벽히 한 것은 아니지만, 3등급 정도 나와요."
"수능이?"
"아뇨, 수능은 더 공부해서 보려구요. 그냥 일반 모의고사요."
재학생과 상담하면, 종종 이런 대화가 전개됩니다. 똑똑한 친구들은 매몰비용 이야기도 합니다. 그간 공부해온 시간이 아까와서, 이 선택을 바꿀 의향이 없다. 일단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재학생은 매몰비용이라는 말을 쓸 자격이 안됩니다. 매몰비용이란, 내가 공부를 한 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성취를 달성한 과목을 버리고 다른 과목을 선택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이미 성적을 완성한 N수생들이 과목 변경을 고민할 때에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고작 현역 학생들이 2학년 때 공부하고, 겨울방학 때 선행한 정도를 가지고서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수능 탐구 과목을 선택하는 메커니즘은 일단, 수험생으로 내가 어느 정도의 공부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좌우합니다. 정시의 과목 선택은 수시와 달리 진로와 완전 무관합니다. 경제학과 진학을 희망하더라도, 선택과목으로 경제를 선택해서는 일반적으로 안 됩니다. 경제경시대회 우승급 학생이면, 선택해도 됩니다만, 그외에는 경제를 선택하지 않고, 평균이 낮은 과목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표점이 상승하기 때문입니다. 수시에서는 물리 선택이 유리하지만, 정시에서는 물리 선택은 그냥 옵션 중의 하나일 뿐, 선택해도 되고, 안해도 됩니다. 보통은 생명과학이나 지구과학을 하는 편이 유리합니다. 그것은 이 두 과목이 '화학'이나 '물리' 보다 시험적으로는 덜 이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자연계의 화두는 과거라면 문과였을 친구들이 입시적 유리함을 위해 이과를 선택하는 '패션 이과'라는 존재입니다. 이들이 어떤 과목을 선택하는지도, 자연계 입시에서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밈도 있습니다.
이러한 밈을 단순히 웃어넘길 수 없는 이유는 선택과목의 표준점수 산출식 때문입니다. 표준점수를 간단히 설명하면, 과목을 선택한 학생들의 평균점수보다 내가 받는 점수가 높을 수록 유리합니다. 만약 내 점수가 올릴 수 있는 최종 단계인 만점이라고 하더라도, 과목을 선택한 학생들이 받은 평균 점수에 따라 내 표준점수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해당 과목 선택 학생들의 평균 점수가 낮을 수록, 자신의 표준점수가 높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볼 때, 과목 자체의 공부량 측면이나, 해당 학생들의 평균 점수 둘 다를 고려한 상황에서 생명과학과 지구과학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다만, 최근에는 지구과학은 매우 각광을 받습니다만, 과목 자체의 난이도는 생명과학이 유리하나, 지원자들의 평균실력이 너무 높아지다보니, 오히려 생명과학은 이제 조금 기피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과학을 선택했던 학생들의 일부가 물리로 이동하는 특성이 나타납니다. 수능에서는 물리1인 제법 해볼만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다른 변수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문이과 구별없는 통합교육과정 수능인 최근의 양상을 반영하여, 이제 과탐과목을 선택하지 않아도, 자연계 학과들을 지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과탐의 가산점이나, 과탐 과목을 필수적으로 지정하는 경우가 있어서 모든 사탐 선택학생들이 자연계 진학(특히 의치약한수 계열)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에 따라 가능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계 선택과목인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과 인문계 선택과목인 9개 사탐과목의 공부량은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입시계에서는 사탐은 과탐 공부량의 1/3 정도라고 합니다. 따라서 수학, 국어, 영어 공부가 시급한 자연계 친구들이라면, 과탐을 선택하지 않고 사탐을 선택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정시에서 패션이과는) 사탐하자, 사탐하자, 나대지 말고, 나대지 말고 라고 변주되어 이야기됩니다.
그런데 또 변수가 생겼습니다. 정시 입시판이 고인물들(N수생)의 잔치가 되었고, 고인물의 특성상 자연계 수험생이 매우 많습니다. 그러니 자연계 선택과목은 정말 잘하는 학생들이 많이 모여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학생들은 정말 매몰비용 때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생명과학으로, 이미 지구과학으로, 이미 물리 등으로 1등급을 받고 있는데, 이 학생들이 표준점수가 조금 더 유리해진다고 해서, II과목으로 선택하기가 쉽지가 않아집니다.
자연계 선택과목은 I과목과 II과목이 있습니다. 즉 생명과학 I,II 물리 I,II 등으로 표현됩니다. I과 II에서 알 수 있듯이 표면상으로는 I과목보다는 II과목의 내용이 심화 단계이지만, 누적이 된다기보다는 별개의 과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시험 자체의 난이도는 II과목이 조금 더 있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N수생들이 II과목을 거의 선택할 수 없는 상태이다보니, 오히려 II과목은 재학생들이 선택하기에 좋은 양상을 보입니다. 당연히 재학생이기 때문에 실력이 N수생보다 평균적으로는 떨어지고, 평균 점수도 낮게 형성되어, 표준점수가 높아지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최근에는 정말 II과을 선택하는 게 재학생의 특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시에서 현역 고3 자연계 상위권 학생들은) II 선택하자, II 선택하자 라고 이야기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정시 탐구 과목의 선택은 수시와는 별개의 양상입니다. 수능은 결과만 의미있는 시험이기 때문에, 최대한의 결과를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를 찾으셔야 합니다. 진로하고 선택과목을 연결하는 선택은 정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실제적으로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하면 됩니다.
만약 수학, 국어 공부가 정시 승부를 보기에 안되는 친구들이라면, 사탐(응시인원이 많고, 예체능 계열 지원자가 많은 과목인 사회문화,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중에서)을 선택하면 됩니다. 수학, 국어 성적이 어느 정도 나오는 친구들이어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이제는 II과목을 선택하면 좋습니다. 표준점수가 있는 시험에서는 해당 과목이 수험생 전체의 평균을 내는 과목인지, 과목을 선택한 이들의 평균을 내는 과목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동일 점수를 받고도 전체 점수가 달라지는 일이 벌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