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는 내신이 제일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수시는 내신이 제일 중요한가요? 그렇다면 수시로 좋은 대학을 가려면, 어느 정도 내신을 받아야 하나요?
수시에서 내신이 중요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신이 제일 중요하냐든가, 어느 정도의 내신이 필요하느냐 등의 질문은 그다지 좋은 질문이 아닙니다. '생존을 하려면 산소가 필요합니까?'처럼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묻고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입시와 관련해서는 좀 더 현명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 내신을 받아야 하느냐 보다 선행되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느 과목을 선택해야 하느냐'입니다.
모든 입학 전형에서는 학생의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평가 자료가 필요합니다. 다만, 정시는 수능 성적이라는 평가 자료를 정량적(양, 객관적, 학업성취도, 시험점수 등 수치화된 정보를 기준으로 평가)으로 사용하고, 수시는 '내신 성적'이라는 평가 자료를 정성적(양, 객관적, 학업성취도, 시험점수 등 수치화된 정보를 기준으로 평가)으로 사용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줄세우기라는 입시의 본질을 고려할 때, 앞 선 위치에 설 수 있는 높은 수능 점수나 좋은 내신 등급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수시의 줄세우기는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특이점에 주목해야 같은 내신, 심지어는 더 부족한 내신으로도 좋은 입시적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정시는 수능이라는 1회적 평가 시험의 점수를 입시에서 사용합니다. 그러다보니 입시적 변수는 늘 일어나지만, 전형 자체는 이해하기가 쉽고, 수험생과 학부모님들도 오해가 없는 편입니다. 그에 비해 수시는 정시처럼 생각해서 몇몇 오해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오해는 입시에서의 경쟁력 부족으로 나타납니다. 이 오해를 몇 화에 걸쳐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시간의 불가역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시간의 불가역성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수시의 줄세우기는 정시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시간의 불가역성이란 '그 누구도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측면입니다. 수시의 대표적인 전형인 '학종'에서 평가 요소는 '학업역량', '진로역량', '공동체역량'입니다. 물론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업역량'이고, 그 대표적인 자료가 '내신 성적'입니다. 그렇다면 '내신 성적'을 잘 받는 게 제일 중요하고, 그 외에는 정시와 차이가 없을 것이라 착각을 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수시의 내신 등급은 3년에 걸쳐서 완성됩니다. 즉, 재학생은 5학기, 졸업생은 6학기의 히스토리가 담겨있는 셈입니다. 내신 등급이라는 결과값만을 살펴보면, 수시라는 줄세우기를 오해하게 됩니다. 사례로 설명하겠습니다.
최근에는 '이과'와 '문과'가 사라진 통합의 시대이지만, 실제로는 해당 학생이 어떠한 과목을 공부해왔는지를 토대로 '이과', '문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입시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과거의 '문과', '이과'의 느낌과는 다릅니다. 현재 입시는 이과를 선택하는 것이 모든 면에서 유리합니다. 그래서 과거였으면 명백히 문과를 택했을 아주 유능한 문과성향의 학생들도 입시적 유리함을 위해서 이과를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과를 선택하고자 하는 가상의 '고1 신입생'의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학교가 어떠하냐에 따라 세부적으로 고려할 사항이 있지만, 그냥 러프하게 수도권 일반계 고등학교로 정해보겠습니다. 보통 이과를 선택하는 학생은 2/3 이상 '의대 진학'을 희망합니다. 그렇다면 이 학생의 주된 관심 교과는 생명과학이 될 것입니다. 과목 선택에 있어서도 생명과학에 해당하는 심화과목, 전문과목을 선택할 것입니다. 아마 동아리도 생명과학 동아리쪽일 것이고, 진로도 의학계열 쪽으로 정해서 활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외 과학은 그냥 기본만 했을 것이고, 만약 조금 더 한다면 '화학'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5학기를 보내고 나서, 3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면, 자신의 내신이 어느 정도임을 알게 됩니다. 정시로 '의대'를 합격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수시로 '의대'를 합격하기도 못지 않게 힘듭니다. 위의 학생이 5학기 평균으로 2.13 내신을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제법 괜찮은 내신이지만, 의대 합격은 불가한 성적입니다.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고 보심이 적절합니다.
만약 이 친구가 유연한 성품이어서, 더이상 의대를 소망하지 않는다고 하면, 학과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시에서는 과거의 히스토리(생기부)를 고려해서 학과 선택이 이뤄집니다. 아마 이 친구는 주력 활동이 '생명과학'이었기 때문에 '생명과학과', '화생공' 등을 고려하다가, 이것도 어렵다고 생각되면, '바이오시스템', '응용생물학'이나 '생물교육'쪽을 고려하고, 그것도 어렵다고 생각하면 '산림과학'이나 '조경', '원예' 등 농대쪽 학과를 향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을 하는 친구들이 아주 많다는 점입니다. '이과'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의대'를 가고 싶었지만, 의대를 갈 수 없는 학생들이단체 차선을 찾기 시작합니다. 비슷한 여정을 밟았기에, 선택하는 경우의 수가 비슷합니다. 그래서 수시의 생명과학관련 학과들은 경쟁이 치열하고, 합격 성적도 올라갑니다. 한줄로 줄세우기가 강제됩니다. 그냥 재학생 이과생들로 미어터지게 됩니다.
이때 다른 학과를 선택하면 되는데, 쉽지 않습니다.
생기부상에 너무도 명확하게 의대를 가기 위해 '생명과학'만 공부했던 뉘앙스가 가득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시의 학과 선택에서 수험생을 거침없지만, 수시에서는 망설임이 크고 빈번합니다. 왜냐하면 지난 5학기 동안 선택해온 흔적들이 히스토리가 되어 입시에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연계에서 가장 많은 학과를 포함하고 있는 단과대가 어디인지. 그것은 바로 '공대'입니다. 그렇다면 공대를 지원하는 것이 유리할 터인데,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못합니다. 왜냐하면, 공대가 기본적으로 '물리' 를 베이스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1, 고2, 고3 시절에 물리를 공부했으면 유리했겠으나, 그것은 지나버린 과거이고, 되돌릴 수 없습니다. '시간의 불가역성'입니다.
그렇다보니, 대학에서 제일 많이 선발하는 학과는 '공대'인데, 정작 '물리' 트랙으로 공부를 해온 수험생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과에서 상위권 친구들은 의대를 위해 '생명과학' 공부에 힘을 실어왔습니다. 물론 고등학교 때 물리를 공부하지 않고도, 수시로 공대를 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생명과학에 힘을 실어서 공부했던 것의 절반만이라도 '물리'에 투자했다면, 대학 진학은 훨씬 유리해집니다. 문제는 고1 때는 이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생명과학'이나 '화학'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 수시 입시에 있어서는 '물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물리 심화교과와 전문교과를 선택하고 집중해야 합니다. 사족으로 만약에 여학생이 '물리'를 열심히 공부하면, '이화여대' '물리학과'과 매우 높은 확률로 가능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