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수시로는 제가 원하는 대학에 못 갑니다. 그래서 정시밖에 안 남았습니다.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제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요?
저는 현재 재수종합반에 근무하고 있으며,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외나 팀수업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역 고3이든 N수생이든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은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요"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지가 필요하고, 이러한 질문은 진짜 가능성의 정도를 알고 싶다기보다는 무서운 현실 가운데 심리적 지지를 받고 싶기 때문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N수생들과는 달리 고3들에게는 다소 냉정하게 말하는 편입니다. "지금부터 열심히 한다고 해도,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고3 수험생은 아마도 '수시'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수시에 대해서 다음 글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예정이지만, 일단 수시는 내가 이미 이룬 성취를 통해서 입학 전형이 이뤄진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수시에서 합격 불합격을 좌우하는 가장 큰 자료는 내가 특정 대학을 진학하는 시점에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정시 또한 수능 성적이라는 이미 이룬 성취를 통해서 입학 전형이 이뤄지죠. 다만, 우리나라는 수시에 1곳의 학교라도 합격하고 나면 정시에는 아무리 좋은 성적을 받아도 희망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이를 수시 납치라고 합니다. 따라서 수시 원서를 쓸 때는 이러한 납치가 될 가능성이 있는(즉, 정시에서 수능 성적을 잘 받을 가능성이 높은) 친구들은 수시 지원을 아주 높이 하든가, 지원을 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수시 원서를 지원하는 시점에 이미 수시를 쓸 것인가, 정시를 쓸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나보니, 수시는 이미 이룬 성취를 토대로 지원을 고민하게 되고, 그 시점에서 정시는 내가 앞으로 받을 가능성이 있는 점수를 토대로 지원을 고민하게 됩니다.
고3 학생들에게 정시보다 수시로 진학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학생들은 잘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저 고3 1학기까지의 내신을 스스로 검토해 본 후,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어려워지면, 정시로 대학을 진학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입시판에서는 이 학생들을 '정시파이터'라고 합니다. 수시로 원하는 대학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확정되었지만, 정시로는 수능을 잘 볼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기대를 갖고 '정시파이터'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부모님은 그러한 자녀들을 기대를 꺾을 수 없기 때문에 일단은 응원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정시 전형은 과거와 매우 달라졌습니다. 예전의 정시라고 생각해서, 고3들이 '정시파이터'가 되는 것을 응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의대 열풍이 만든 특이한 양상이겠으나, 현재 정시 입시판에는 '고인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래 자료를 보시죠. 재작년의 자료를 대략 정리한 것입니다.
수시를 제외한 서울대 정시 합격 비율입니다. 현역(고3) 친구들의 비율이 재수생만큼 높습니다. 이것만 보면 정시파이터가 할 만한 거 같습니다. 그러나 서울대보다 더 높은 최상위 학교가 있습니다. 입시판에서는 그러한 학교그룹을 지칭하여, '의치약한수'라고 합니다.
아래 자료를 보시죠.
<참고> 의대 정시 합격 비율:
현역: 26.3%,
재수생: 44.2%,
삼수 이상:29. 4% (18.1%-삼수생 + 11.3%-사수생 이상)
정시에서는 의대 중에서 가장 낮은 학교급의 입학 점수가 서울대 대다수 학과의 입학점수보다 높습니다. 서울대의 3개 학과 정도는 다른 의대보다 높겠으나, 보통은 의대가 서울대 대부분 학과보다 합격컷이 높습니다. 그런데 현역으로 의대를 합격한 비율은 26.3%이고 삼수생 이상 합격 인원이 29.4%입니다. 재수생은 44.2%이니, 이미 현역과의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즉, 현재 정시는 완전히 재수생 이상 학생들의 순위 놀음이 되었습니다.
현역 고3 정시파이터로 불리는 학생들은 이러한 입시적 현실을 모르고, 현재의 내신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수시보다는 정시를 택한 친구들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정시를 택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정시로 내몰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기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수능을 잘 볼 수 있는 가능성에 베팅하려고 합니다. 그 베팅이 무조건 문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현실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시는 고3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썬 더 괴롭고 어려운 길입니다.
따라서 현역 고3 학생들은 무조건 수시로 대학을 가능 것이 유리합니다. 그 수시로 지원 가능한 대학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가능성에 중독되어 입시 낭인의 삶을 살고 있는 학생들을 너무도 많이 봐 왔습니다. N수생의 삶에 접어 들기 전에, 현역 고3 학생이라면, 수시에 집중하라는 말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