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한국 → ②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시베리아 횡단 열차) → ③ 러시아 모스크바 → ④ 우크라이나 키이우 → ⑤ 그리스 아테네 → ⑥ 그리스 산토리니 → 그리스 고린토스 → 알바니아 티라나 → 몬테네그로 포드코리차 → ⑦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 ⑧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 오스트리아 비엔나 →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 ⑨ 체코 프라하 → ⑩ 독일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부르크, 본 → ⑪ 네덜란드 뒤셀도르프, 노테르담 → 벨기에 브뤼셀 → ⑫ 이탈리아 베니스 → ⑬ 이집트 카이로→ ⑭ 짐바브웨 빅토리아 폭포 + 보츠와나 국립공원 → ⑮ 남아공 케이프타운 → ⑯ 나미비아 나미브사막 → ⑰ 스페인 바르셀로나 → ⑱ ~ ㉓산티아고 순례길→ ㉔ 포르투갈 포르투, 리스본, 에리세이아, 신트라 → 라고스 → 파고 → 세비야, 론다 → ㉕ 모로코 탕헤르 → 텐투안 → 쉐프샤우엔 → 페즈 → 쉐프샤우엔
① 탕헤르 → ② 테투안 → ③ 쉐프샤우엔→ ④ 페즈→ ⑤ 마라케시 ③과 ④ 사이를 왕래하다.
방랑 시작 D+116일(2017.7.4.) 모로코 여섯째날 in 페즈
마라케시에서 터키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내일 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늘 중으로 페즈를 떠나야 했다. 5일에 터키로 출발하고, 11일에 터키 안탈랴에서 아제르바이젠으로 출국하는 비행기표를 이미 결제한 상태이다. 터키에 가지 못하면, 이 모든 계획들이 으그러진다. 어제 페즈에 도착하여 거의 밖을 나가지 않고, 숙소에서만 지냈기 때문에 피곤하지도 않았고, 짐도 거의 풀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나갈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내 삶에 균열이 생겼다. 이 균열은 사십년간 반복되었던 지겨운 나의 습성을 한번은 어겨보고 싶은 소망을 품게 했다. 어제 하루 종일 고민했음에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결정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한참을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 그 다음 순간의 작은 흔들거림에도 바뀌기 일쑤였다. 숙소 직원이 체크아웃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왔다. 이제 결정의 순간이다. 마음의 향하는 곳을 깨닫고, 챙겼던 짐을 내려놓았다. 숙소 직원에게 하루를 더 머무르겠다고 했다. 터키행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궁금한 사람이 있다. 거창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그냥 계속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너무도 짧게 스쳤음이 아쉬웠고, 다시 만나고 싶었다. 동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머뭇거렸던 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그때의 망설임이 그 이후 4일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모로코에 들어온 첫날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타이밍에 내 영역에 들어왔다가, 그대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떠났다. 그녀는 탕헤르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고, 나는 다른 동행들과 시계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아주 짧은 스쳐감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다시 만나서 차를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다면, 터키행 비행기표를 날리는 것도, 터키를 못가는 것도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망설임의 이유는 내 행동의 주제넘음과 40이라는 나이, 그리고 부담을 주는 것에 대한 염려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40년 동안이나 반복되었던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내 오랜 습성에 기인함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기가 싫었다.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내일은 그녀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쉐프샤우엔으로 이동을 결심했다. 다시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
방랑 시작 D+117일(2017.7.5.) 모로코 일곱째날 in 페즈 → 쉐프샤우엔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11시경에 버스정거장으로 향했다. 쉐프샤우엔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오후 4시 15분에 출발하는 버스만 자리가 있었다. 짐을 보관소에 맡긴 후에, 이틀간 숙소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전혀 모르는 페즈의 미로 시장을 탐험했다. 평상시였으면, 매우 흥미로웠을 풍경이 계속 나타났지만,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 탑승 시간이 공교롭게도 비행기 이륙시간과 10분 차이였다. 원래 계획이었던 터키행 비행기 대신에 쉐프샤우엔행 버스에 탑승하게 된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예전에 왔던 길을 역으로 가다보니, 길은 제법 익숙했다. 버스는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쉐프샤우엔에 도착했다. 정거장에 내리니 오만생각이 든다. 여기를 이렇게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이틀 전에 머물렀던 숙소를 찾아갔다. 호텔 주인은 왜 다시 왔느냐고 놀란다. 일단 하루만 머물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그러게, 왜 다시 왔을까. 만나면 할 말이 있는가. 나의 오랜 습성을 보건대, 막상 만나게 되면, 아무 말도 못하고 버벅거릴 것이다. 그렇지만 만나고 싶다. 우연이라도 스치듯이라도 잠깐만이라도 만나고 싶다.
파란색 도시.. 야경 또한 신비롭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쉐프샤우엔의 중심지를 계속 맴돌았다. 이곳은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니니 이곳에 있다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서... 사실 여기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이틀 전에 마지막으로 교환했던 메시지에는 쉐프샤우엔에 들릴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실제로도 그럴지는 모른다. 쉐프샤우엔에 있기를 바라며, 시내를 계속해서 맴돌았으나, 만나지 못했다.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겁쟁이 습성이다. 만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만나게 될까봐 무섭다.
아주 작은 마을인 쉐프샤우엔에는 그 중심에 마을 광장이 있고, 크리스마스 트리같은 큰 나무가 중앙에 있다. 밤이 되면, 그 주위로 거의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이 큰 나무를 계속해서 돌면서, 그녀의 흔적을 찾았다. 설렘과 두려움으로... 결국은 만나지 못하고, 10시가 되었다. 내 숙소는 마을 외곽에 떨어져 있는 곳이어서 택시를 타고 올라가야한다. 오늘은 우연히 만나는 것을 실패했으니, 내일은 의도적으로라도 만나기 위한 시도를 해야겠다. 아... 쉐프샤우엔에 있을까.
쉐프샤우엔 중앙 광장의 큰 소나무. 자연스레 약속 장소가 된다.
방랑 시작 D+118일(2017.7.6.) 모로코 여덟째날 in 쉐프샤우엔
쉐프샤우엔.. 파란색 염료로 칠해진 도시... 촌스럽지만, 낭만적이다.
파란색으로 가득찬 길을 걸으면, 마치 꿈꾸는 듯하다.
한여름밤의 꿈 속에서..
1. 어제 머물렀던 숙소는 마을 광장에서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짐을 챙겨서 마을 쪽 숙소를 급히 찾아 이동을 했다. 숙소에 오래 있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을 쪽의 가장 싼 숙소를 찾았다. 숙소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면서, 광장 나무 앞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어쩌다보니, 여행 중에 제일 많이 보게 되는 곳이다. 쉐프샤우엔 중앙광장의 크리스마스트리같은 나무.. 정말 기억이 많이 나겠구나.
2. 시간이 되어 숙소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노트북만 챙겨서 광장으로 나갔다. 햇살은 뜨겁고, 오가는 사람들이 뜸하지만 있었다. 전에 생일파티를 했던 식당 앞을 지나다가, 와이파이가 자동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고, 한 구석에 자리를 펼치고 앉았다. 식당 주인은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이야기했다. 거기서 글도 쓰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녀가 쉐프샤우엔에 있는지 궁금했다. 메신저로 연락을 해보니, 쉐프샤우엔에 있었다. 아... 떨림의 정도가 심해진다. 내게 터키는 어떤지 물어온다. 거짓을 말할 수는 없고, 아직 사실을 말할 수도 없고... 아직 터키는 잘 모르겠다고 답을 했다. 아직, 터키는 잘 모르겠다.
3. 나름 저녁에 만나면 어떨까... 그렇게 머릿속으로 복잡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이것저것을 끄적이고 있을 때였다. 기억 속, 그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여기에 계셔요? 터키에 가신 거 아니셨어요?”
무언가 준비해서 만나려고 했는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렸다. 마음으로 준비했던 것들이 엉켜버렸다. 내 앞의 사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마음속 비밀이 들킨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른다. 겨우 한마디를 했다.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녀가 떠나간 후,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내게 식당에서 서빙하는 친구들이 다가와서 어깨를 두들겨준다. 그들도 대충 상황을 파악한 듯하다.
4. 왜 여기에 계세요? 뭐라고 답해야 하나. 내가 그 사람 입장이라면... 터키에 있어야 되는 사람이 갑자기 내가 머물고 있는 동네에 나타난다라.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무서울 거 같다. 아, 나는 그냥 스토커일 수 있겠구나. 썬글라스로 눈을 가리며, 담담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계속 얼굴이 달아올랐다. 꼬인 시나리오. 영화같이 멋있는 재회는 이미 물건너갔다. 이제 정공법밖에 없다. 사정은 만나서 이야기할테니, 9시에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생긴 큰 나무 앞에서 만날 수 있느냐고 연락했고, 다행히 그렇게 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5. 쉐프샤우엔의 크리스마스트리라고 내가 부르는 그곳에 약속 시간 1시간 전에 나가서 기다렸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잘 웃는 나를 보며, 함께 웃었다. 아. 이 사람들이 다 나를 싫어해도 괜찮으니, 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기타를 치며, 공연을 하는 친구에게 마음속으로 나름 행운을 빌며, 돈을 넣었더니 이 친구가 내 옆에 앉아서 기다리는 내내 노래를 불러줬다. 떨림이 조금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계속 꿈꿨던 시간인데, 아, 눈을 안 마주치는 거 같다. 망필(Feel)이다.
6. CASA ALADIN.. 마을 광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전망을 지닌 카페 겸 식당의 옥상에 가서 음료를 주문하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침묵... 아... 초점을 잃은 눈동자. 역시나 망필(Feel)이다. 어색해하는 상대를 맞대어 앉아있는 것은 참으로 공포스러운 일이다. 언제나 이게 무서웠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끝까지 가보리라는 각오는 있었다.
7. 미안합니다. 일부러 속인 것은 아니고, 여행 여정이 남으셨는데, 제가 다른 여행일정을 포기하고, 여기에 남는다고 하면 부담을 느끼실 거 같아서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그렇다고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이렇게 비밀로 하고 있다가, 모로코에서 떠나시기 직전에 한번 뵙고 싶어서 이렇게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그리고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라는 것은 딱 1시간만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면 충분합니다.
8. 어둠이 내린 쉐프샤우엔의 가정집 불빛이 시원한 바람과 어울려져서, 답답한 분위기를 풀어준 것일까... 처음의 답답함이 점차 사라졌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여행이야기, 남은 여정에 대한 이야기, 모로코 이야기, 그리고 느꼈던 감정에 대한 이야기... 처음의 기대는 1시간만 이야기하는 거였는데, 2시간이 넘어, 11시 10분까지 이야기를 했다. 그건 그냥 CASA ALADIN의 옥상 카페가 시원하고 예뻤기 때문일 것이다.
9. 두 달을 계획하고 온 그녀는, 스페인과 스위스를 1달간 더 여행을 할 예정이고, 이미 4개월을 떠돌고 있는 나는 앞으로 3개월을 더 떠돌아다닐 예정이다. 내 남은 여행지 중에서, 인도에 대한 관심이 높다. 원래 인도를 오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해서 못 왔다고. 인도에서의 계획을 묻길래, 아마도 틀어박혀서 글을 쓸 것이라고 했다. 쓴 글이 궁금하다고 하는 그녀를 보며, 인도에서 독하게 틀어박혀 글과 승부를 보기로 다짐해 보았다.
10. 오늘 함께 차를 마시기 위해 제 인생에서 제일 비싼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이렇게 비싼 찻값은 처음입니다. 그리고 그 비용이 전혀 아깝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험도 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틀 전에 비행기를 타지 않은 제 자신이 무척이나 기특합니다.
11. 고백하고 그런 것은 못했다. 운명. 그런 것도 모르겠다. 그냥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니 좋았다. 늦은 시간이라... 숙소를 데려다주는데. 방향이 이상했다. 내가 오늘 새롭게 체크인 한 숙소 방향. 알고 보니, 같은 숙소 2층의 옆방이었다. 그냥 조급하게 연락하지 않고, 조금 더 진득하게 새롭게 잡은 숙소에서 있었으면, 더 극적인 재회가 되었으려나.
12. 숙소 옆방에서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니, 화장실을 오가는 길에 만날까봐 떨렸다. 그래서 1층에 내려왔다. 참, 다양한 생각이 밀려들어왔다. 숙소 바로 앞이라 와이파이가 되니,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어제도 잠을 잘 못 잤는데... 오늘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밖에 있었다.
13. 여행지는 여행지일 뿐, 돌아가면 다른 느낌일 것이고, 또 인생이 생각만큼 낭만적인 것은 아닌지라, 아마도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예상이 강하게 들었다. 나란 인간은 이성에게 그렇게 매력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저 40세가 된 실업자일 뿐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끝까지 마음을 전했다. 이 사실로 인해 나는 조금 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이 사람과 인연일지, 다른 사람과 인연일지 알 수가 없지만, 나는 앞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궁금한 사람이 생겼을 때, “나는 당신이 궁금합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14. 나보다는 아라비어를 잘하는 그녀에게 굳바이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마쌀라마 엘랄렉카"라고 알려줬다. 정확한 뜻을 물어보니, “잘가, 다음에 또 봐.” 또 보자는 말은 참 설레는 말이다. 그래, 마쌀라마 엘랄렉카.
덧. 그리고 이것은 한여름밤의 꿈일 뿐이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는 마음만큼, 그는 멈춰있거나 뒷걸음을 쳤다. 각자의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이후 몇번 메시지를 주고 받기는 했지만, 곧 중단되었고, 이날을 마지막으로 만난 적은 없다. 꿈에서 깨어난 이들은 각자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