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락의 여인

by 도라지

아침부터 푹푹 쪘다. 대체공휴일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것은, 차려야 할 밥때가 더 많아지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찜통더위에 자칫 짜증지수라도 높아지면, 연휴고 뭐고 본전도 못 찾을 판이다. 이런 땐 차라리 집 밖으로 나가는 게 유리할 수도 있다고 계산했다.


"말복도 지났는데 몸보신 좀 시켜줘유~" 이틀 전 말복에 분명 무언가 바깥 음식을 먹긴 먹었던 것 같다. 그래도 모른 척, 슬며시 남편 등 떠밀며 점심에 추어탕을 먹으러 나갔다.


"수정이 며칠 전에 남자랑 소개팅했대. 근데 그 남자가 클락에서 골프 관련 사업을 한다네~ 골프장을 경영하는 건지 어떤 건지 수진이도 정확하게는 모르더라구. 암튼 그 남자를 소개한 사람이 000 리조트 대표라는데, 설마 000 리조트 대표가 사기꾼을 소개하진 않았을 테고."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남편이 입을 열었다.


"클락에서 골프장을 경영하는 사업가가 왜 수정씨를 소개받아? 말도 안 되지. 주변에 젊고 예쁜 미녀들이 얼마나 많을 텐데~"


남편의 철저히 자본주의적이고 형이하학적인 논리가 곧 세상 남자들의 논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적극 맞장구를 쳐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날에는, 해소되지 못한 채 웅크려있던 내재된 불만이 기어이 그 순간에 터지고야 마는 그런 때가 있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당신과 다른 논리를 갖고 사는 남자들도 세상에 있어. 세상 남자가 다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늙고 안 예뻐도 그 여자의 가치관을 볼 수 있는 남자라면, 그 여자 자체와 운명적으로 소통할 수도 있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 나 역시 '이것은 바람일 뿐이야'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제 그 시간 속에 있던 나는, 설득력 없는 이상적인 논리일망정 그 논리를 고집하고 싶었다.


내가 즐겨 가는 추어탕집에는 누구나 먹을 수 있는 공짜 막걸리통이 벽 한편에 의젓하게 두 통이나 서있다. 돌솥밥이 익으려면 10분 이상 걸린다. 밥이 나오기 전이지만, 밑반찬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을 들이켰다. 공짜 막걸리였지만, 보름 전까지만 해도 막걸리 맛이 먹을만했었다.


그 사이 막걸리 농도가 더욱 옅어져서, 이제는 아무나 공짜 막걸리를 먹고 싶어 하지 않을 맛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시원한 맛으로 두 잔을 벌컥벌컥 마셨다. 반이 물맛인 막걸리일지언정 두 대접을 벌컥벌컥 마실 줄 아는 나란 아줌마, 이러니 남편한테 아저씨란 소리를 듣는 거다.


"그 남자한테 연락이 오는지 안 오는지 두고 보면 알겠지."


당연히 연락이 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에 찬 남편의 말이 여전히 거슬렸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클락의 소개팅남과 내 친구 수정이 얘기는 추어탕을 먹으면서도 계속되었다. 세상에, 무슨 확신을 저리도 굳건하게 한단 말인가.


"수정이 그동안 살도 빼고 여성성도 업그레이드되고, 음.. 이젠 정말 남자를 만날 때가 된 듯한 느낌이 나던걸~"


나의 적극적인 반론에도 남편의 확신은 요지부동이다.


"그렇다고 해도 육십이 넘은 남자라면 모를까, 그 남자 나이가 수정씨보다 서너 살 위라며. 절대 연락 안 오지."


남편의 기질은 신도 나만큼 모를 거다. 그래, 이쯤에서 '너의 확신의 승리'쪽으로 방향을 잡아주는 편이 서로에게 이롭다는 계산을 얼른 내 머릿속에서 마쳐야 한다.

"그런데 수정이를 남자에게 소개하는 자리에 같이 나갔던 주선녀가 그날 장관이었나 봐. 향수를 한통 쏟아붓고 등장한 건 양반 짓이고, 코르셋 같은 원피스 차림으로 가슴을 완전 돋보이게 하는 스킬을 장착하고 나왔다네, 암만 해도 주선녀가 클락의 그 남자를 맘에 두고, 그런 자리를 만든 건 아닌가 의심스럽더라구. 글쎄, 주선녀가 소주 몇 잔 마시더니 거기서 쓰러지기까지 하셨대~ 어이가 없어서."


"그럼 이쪽에서 수정씨랑 주선 아줌마, 저쪽에선 000 대표랑 클락, 그렇게 넷이 만난 거래?"


남편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다섯이었대, 000 대표 친구 한 명까지 더 있었나 봐."


마누라의 시큰둥한 대답에, 남편이 평소엔 잘 굴리지 않는 두뇌를 몇 초 회전시킨 후에 다시 물어왔다.


"주선 아줌마도 수정씨처럼 처녀야?"

"아니, 애가 셋이나 있는 유부녀. 유부녀도 애인 사귀는 세상이잖어."


바람피우는 얘기 앞에선, 누구나 깨끗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들키지 않으면 무죄이고, 들키면 유죄가 되어버리는 현실은 그래서 공정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말이다.


이제 남편과 공통으로 의견이 일치하는 지점을 찾았다. 주선녀의 복장과 향수, 그리고 술 먹고 쓰러진 행동 등 그녀의 태도는 주선자로서 바람직하지 못했다고 우리는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의 공통된 의견이 비록 얼굴도 본 적 없는 완전한 타인에 관한 것이었지만, 남북으로 갈라진 한 민족의 애환만큼이나 깊어질 수도 있었던 우리 부부의 신념 대립의 문제는, 어찌 되었든 주선녀로 인해 일단락되었다.


평생토록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수정이는, 실제 활동을 중시하는 사회복지학과 교수다. 비혼주의자도 아닌 그녀가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한 것에, 나는 일종의 불만을 그녀에게 가지고 있었다. 박사 따려고 노력했던 것만큼의 일부라도 너의 여성성 개발에 투자하라고 늘 잔소리를 했었다.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 빛날 수 있는 건, 매우 특별한 경우일 뿐이다. 그런 빛나는 원석의 운명은 아무나 타고나지 않는다. 그녀에게 가공은 옷차림의 변화와 체중감량, 그녀만의 여성적 매력 개발 등을 의미했었다.


몇 달 만에 만난 수정이가 잔잔한 플라워 패턴의 감색 블라우스를 바지에 받쳐 입고 나왔다. 이제껏 입지 않았던 스타일의 블라우스다. 저기에 롱스커트를 코디해서 입었어도 이제는 잘 어울릴 거 같았다. 미소마저 한결 여유로워진 그녀가, 여전히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클락의 남자 얘기를 들려주었다. 주연은 수정이와 클락의 사업가임에 틀림없어야 했는데, 조연으로 등장한 주선녀가 마치 주연 행세를 하려 했으니, 내 목소리에 분노와 적의가 담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던 것 같다. 개운치 않은 주선녀의 행태는 누가 보아도 저급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수정이를 알고 지낸 지가 삼십오 년이다. 한결 고상하게 여성스러워진 수정이의 달라진 옷차림과 몸짓에는 많은 노력이 있었음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 대립되었던 나의 신념에 대한 희망을 그녀에게 걸어보기로 한다.


'클락, 제발 수정이에게 연락 좀 주세요~'


(2020년 8월 18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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