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의 동의 없으므로

by 도라지

'아줌마, 눈코입 표시는 하고 다니셔~' 어디선가 낯익은 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현관 앞에서 모처럼 구두를 신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다시 방에 들어가 화장대 앞에 섰다. 역시 남편의 충고대로 눈썹이라도 그리고 나니까 사람이 한결 선명해 보인다.


남편의 눈코입 표시론이 언제부터 나를 향해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남편의 그 지적질은 결국 당신 마누라의 늙음에 대한 불편한 마주함이었다.


오늘은 범죄피해자 법정 동행이 있는 날이다. 형사 법정에 들어서는데, 방청석이 만석이다. 자리가 모자라서 법정 안 벽에 기대어 서있는 사람들마저 보인다. 423호실로 들어서면서 흘깃 보았던 모니터에는 수십 건의 사건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 수많은 사건들이 오늘 오후 안으로 다 처리가 된다는 것이 실로 놀라울 뿐이다.


오늘이 선고일인 사건들부터 빠르게 호명된다. 이미 죄수복을 입은 피고들과 아직 민간인의 신분에 있는 피고들조차도, 피고석에 들어서고 나갈 때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동작들이 민첩하다. 그들도 만석의 방청석을 보고, 오늘 이 법정 안의 사정을 다 아는 눈치였다.


죄를 지은 사람들도 검사도 판사도 모두가 바빠 보였다. 죄를 짓고도 엄중하게 혼날 시간도 없이, 피고들은 선고를 받아내는 "일"로서 오늘 법정에 온 것만 같았다.


피고들에게 형량을 선고하는 판사의 목소리가, 빠르게 책을 읽는 속도보다 더 신속하다. 삼십여분이 흐르는 동안 벌써 열 건의 사건번호가 호명되었다. 드디어 그녀 차례다. 방청석에서 증인신문을 기다리며 바짝 긴장해있던 그녀가 증인석에 서기도 전에, 증인신문에 그녀의 고등학생 아들이 동행하여 출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판사는 그녀를 되돌려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녀는 증인석에 앉기는커녕 그 낮은 쪽문을 통과해보지도 못하고 법원을 나왔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나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검찰과 법원 쪽에 내가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위해 쓴 탄원서가 제출되었고, 검찰에서는 그 의견을 수렴하여 그녀의 단독 증인 출석에 동의하기로 되어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판사님은 그 탄원서를 읽어보지 않으셨느냐 묻고 싶었지만, 나는 법정에서 아무런 발언권을 가지지 못한 일개 방청 시민일 뿐이었다. 내가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그녀의 변호인이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판사는 "피고의 동의 없으므로" 오늘 그녀의 단독 증인 출석을 용인하지 않았다. 이것이 법치국가의 현실이다. 내가 가진 법률 지식이 일천하지만, 피고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오늘 이루어진 판사의 재판에 관한 결정 역시 지엄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다음 공판 기일을 받아 들고 하는 수 없이 법원을 나서기는 했지만, 무언가 의구심이 드는 걸 떨칠 수가 없다. 물론 부부의 이혼과 재산 분할 과정에서 폭력 같은 거 없이 조용히 처리되는 경우도 많겠지만, 병원 가면 세상 사람들이 다 환자처럼 느껴지듯이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일을 하면서 보게 되는 세상 속에선 참 나쁜 남편들도 많다.


나는 특히나 미성년자 자녀를 둔 부분에서 매우 취약한 편이다. 감정이입을 너무 한다. 그것이 올바른 태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상식적인 게 무엇인지는 안다. 친아비가 자신의 형량을 좀 덜기 위해서 자기 자식을 와이프 폭행의 증인으로 법정에 세우겠다는 그 발상부터 정상적인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사건의 정황과 발단을 따지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전치 10주 진단의 두 차례의 폭행은 다른 증인 신문 없이도 사건은 이미 명백하지 않은가. 여기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들이 포진되어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집에 돌아와 그녀의 아들을 생각하며 두 번째 탄원서를 쓴다. 이번엔 그 탄원서를 누가 읽었는지까지 정확하게 확인할 참이다. 피고의 요청과 권리가 간과될 수 없듯이, 이 사건의 증인으로서의 아들의 심리상태 역시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녀의 변호사도 아닌데, 나는 그녀의 바람처럼 이 재판을 이기고 싶어 진다. 판사님의 "피고의 동의 없으므로"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인터넷이라도 뒤져서 형사상 미성년자는 아니지만, 엄마가 보기엔 아직도 어리고 여린 아들의 증인신문 출석 거부의 판례 등을 조사해보려는데, 민사상 미성년자 신분을 탈각한 지 수년이 지난 우리 집 큰아들이 "맛있는" 저녁을 해달라고 한다.


면도를 하지 않아 코밑이 거무스름한 다 큰 아들이, 온종일 씻지 않아서 기름기 번들거리는 얼굴로 식탁에 앉는다.


(2020년 6월 24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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