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How long? 18

꿈 속에 내리는 눈

by 도라지

꿈을 꾼 것 같았다. 재영은 떡갈나무 숲 속의 낙엽 위에 현진과 나란히 누워있었던 꿈을 꾸었던 것인지, 실제로 태초의 인간이 되어 현진과 한 몸이 되었던 것인지 분간이 안되고 있다.


현진도 일상으로 돌아와 생활하면서도 자꾸만 아득해진다. 재영과의 섹스는 환희와 열정만 있는 게 아니었다. 놀라움과 충격이었다. 자꾸만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숲 속을 헤매고 있는 거 같았다.


지은은 십 년 전 처음으로 분양받아 이사 왔던 아파트에서 짐들을 뺐다. 마치 지은의 영혼은 가구가 없는 허전하고 쓸쓸한 오래된 집처럼 느껴진다. 손에 큰 가방을 하나 들고 있던 지은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급히 화장실로 들어간다.


몸에서 액체를 변기 속으로 배출하며 비데 위에 앉아 있던 지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후회나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홀로 생을 마주하며 운명 앞에 맞서는 자의 쓰라린 고통과 같은 눈물이었다. 거기에는 이제 더 이상 남편도 동우도 없었다. 친구도 사랑도 나를 외롭게 하지 않는다, 나를 외롭게 하는 건 진짜 우정도 진짜 사랑도 아니다.


인간은 밤의 동물로만 살 수 없다. 지은은 동우와 네 번을 만나고 깨달았다. 사랑은 그저 꿈같은 환상일 뿐이었다. 몸을 통해 처음 만났을 때 갖게 되는 뜨거움은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금세 소멸되는 화학적 산화 과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남자와 잠자리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여자는 남자에게 구속되고, 남자는 만족하며 다른 곳을 향하게 된다. 지은은 남자의 속성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동우를 유혹하여 동우의 아내로서 새 출발을 해보겠다던 지은의 은밀한 계획은, 학원 고등학생들의 겨울방학 계획표와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해가 바뀌고 1월의 어느 날에 동우가 급하게 한선영과 결혼식을 올렸다. 지난 시월 하순경 동우의 오피스텔로 선영을 불렀을 때, 선영은 임신을 했다. 약사답게 빨리 임신 사실을 체크하고, 일주일 만에 예식장을 잡고 일사천리로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음력 설날이 오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는 게 좋다고, 선영의 어머니가 동우에게 말했었다.


동우의 결혼식에는 재영과 태환이 참석했다. 현진도 부르지 않았다. 동우는 어차피 벌써부터 선영과 결혼을 전제로 만난 사이였다. 되어질 일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동우의 마음에는 무언가 확신이란 것이 없다. 회계사 형 말처럼, 숫자만 확실하면 인생은 다른 게 필요 없다는 말을 주문을 외듯이 떠올려본다.


태환은 동우의 결혼식이 끝나고 소연이 운영하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소연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늘 천안에서 식당과 모텔에만 잠시 머물렀다. 오랜만에 쫓기지 않는 안락하고 평온한 기운을 느껴본다. 소연의 공간이 가평 펜션보다 더 내 집처럼 느껴진다. 태환은 이제 서울 집도 편안하지가 않았다.


소연은 단정하게 니트 차림의 원피스를 입고 태환을 맞았다. 여전히 풍만한 몸이지만, 일하는 공간에서의 느낌은 달랐다. 자기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소연을 멋있는 여성으로 보이게 만든다.


"동우씨 결혼식은 잘 끝났어요? 신부가 아름다웠나요?"


"네, 신부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신랑은 최고로 멋졌어요~"


"태환씨,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가 쓸쓸해요."


"무슨 일은요~ 아무 일 없어요. 동우도 제 짝을 만나는구나 싶어서 그러죠."


태환이 힘 없이 말끝을 흐렸다. '과연 우리들에게 제 짝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태환은 생각했다. '나는 이제 서울 와이프보다 저 여자가 더 편하고 좋다.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꼭 섹스 때문만이 아니다. 그냥 이렇게 함께 차를 마시고, 이야기하고, 길을 걷고 싶다.' 태환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와이프랑 나란히 둘이서만 길을 걸어본 게 언제 적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소연씨, 우리 결혼할래요?"


난데없는 태환의 질문에 소연이 놀라기는커녕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태환씨, 정말 무슨 일 있나 보네요. 나는 이혼녀니까 언제든 결혼할 수 있지만, 태환씨는 아니잖아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커피숍 창밖으로 커다란 눈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소연의 마음에도 하얀 눈송이들이 내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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