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은 입시학원의 내부 전체를 리모델링했다. 동우와 처음 키스를 나누었던 원장실부터 뜯어고쳤다. 돈을 들이고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을 택했다. 세무 일은 동우가 자진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양했다. 새로운 세무사는 지은의 평생 세무 파트너로서 극진히 모실 것을 약속했다. 동우형의 신신당부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누가 세무 일을 하든 상관없다. 지은은 이제 동우를 잊을 것이다. 잊기로 하면 여자가 남자보다 빠르다. 잊지 못할 쪽은 동우일 것이라는 걸 지은은 알고 있다.
지은은 봄이 오는 길목에 갑사를 혼자 다녀왔다. 동우와 가을날 함께 걸어 올라갔던 산길을 그대로 따라서 지은이 올라갔다. 산에는 녹지 않은 눈들이 아직도 그대로 하얗게 남아 있고,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아직 떨어지지 않은 마른 나뭇잎들이 가지에 매달려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기다랗게 말린 몇 안 되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파르르 몸을 떤다.
사람들이 하늘에 걸려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며 지나갔다. 나뭇잎들을 다 털어내고 빈 몸으로 서있는 나무 꼭대기에서 흰색 구름을 달고 있는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지은은 동우와 딱 한 번 산길을 같이 걸었다. 모텔방의 기억은 다른 남자를 통해서 금방 잊혀질 것도 같다. 하지만 가을날 둘이 걷던 산길에 대한 기억은 쉽게 잊혀질 것 같지가 않다. 아직도 지은은 그 기억에 갇혀있다.
지은이 높은 산 위에서 하늘을 바라본다. 저 멀리 바라다보이는 산의 능선 위로 주황색의 노을이 두껍게 선을 그으며 한 층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동우와 함께 바라보았던 노을이었다. 그날은 노을이 아름다웠는데, 오늘은 노을이 아프다. 수풀 속에서 새가 날아올랐다.
동우와 함께 걸어 올라갔던 산길의 반대 길로 지은이 산을 내려왔다. 산아래 어느 식당 앞에 커다란 전신 거울이 길 밖으로 나와 있는 게 보인다. 지은은 그 거울을 지나치면서도 거울을 쳐다 보지 않았다. 오늘은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동우는 상처를 준 적도 없는데 상처받은 것 같은 지은이 이제야 소연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나는 소연보다 더한 년이 되리라고 지은은 다짐한다.
재영은 떡갈나무 숲 속 같은 곳에서 현진과 몸을 마주한 뒤로, 대전에 갈 때도 현진을 찾지 않았다. 동우의 결혼식이 끝나고 태환이 소연을 만나러 가는 것을 재영은 알고 있었다. 태환의 그 단순한 방식이 재영은 존경스러웠다. 현진이 재영의 연락을 기다릴 것을 알면서도 재영은 몇 달 동안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실수도 아니고 잘못이나 죄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재영은 선뜻 현진에게 연락을 못하고 있다.
연락을 기다리던 현진은 온갖 생각들로 괴로워 미칠 지경이다. 내가 부족했나, 아니 남자에게 환장한 여자로 보였나, 아니면 정관 수술한 걸 와이프한테 들키기라도 했나, 별의별 추측과 상상들로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내일이면 딱 죽을 거 같은 금요일 오후에 재영에게서 톡이 왔다.
"현진아, 내일 섬진강 따라서 매화꽃 보러 안 갈래?"
토요일 오전에 현진은 재영의 차를 타고 섬진강 쪽으로 향했다. 꼭 매화꽃을 보지 않아도 좋다. 그냥 둘이 다시 만나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섬진강을 따라 광양까지 내려갔다.
"그동안 연락 못해서 미안해, 현진아~"
'너를 보면 다시 여자로 안고 싶어질까 봐 연락을 못했어'라고 재영은 마음속으로만 말을 했다. 현진을 사랑한 세월이 벌써 이십오 년이다. 대학 시절의 첫사랑 현진과 이별을 할 때, 둘은 너무 어렸고 뭘 몰랐다. 사소한 오해로 빚어진 다툼으로 현진은 이별을 선언했었다. 재영이 말했다.
"다시 너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지난번 기억은 소중하게 묻어두자. 우리가 남녀로 계속 만나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끝이 올 거야. 그 끝에서 너를 볼 수 없게 될까 봐, 나는 그게 두려워."
재영이 하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 건지 현진도 잘 안다. 현진도 똑같은 걸 고민하고 여러 번 생각했었다. 다시 재영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고도 싶지만, 그런 욕망 때문에 두 사람과 주변이 파국으로 치달을 게 자명했다. 여자와 남자는 몸으로 소통하다 보면, 이상하게 소유욕이 더욱 강해지고 질투하고 이별한다는 것쯤 현진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현진이 재영의 말을 받으며 이야기했다.
"그래, 우리가 서로 부모님 장례식장에도 조문 갈 사이인데, 그때 일은 없던 걸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말하는 현진도 듣는 재영도 명치끝이 저려오는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