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How long? 20(최종회)

영원과 순간

by 도라지

"현진아, 눈 감아 봐."


재영의 말에 현진이 눈을 감는다. 차가 멈추고 재영의 손이 현진의 얼굴 앞에 다가왔다. 재영이 또 손가락으로 현진의 감긴 눈을 장난스럽게 열었다.


"현진아, 저기 매화꽃 천지야. 그래도 내 눈엔 너만큼 이쁘지도 않아~ 우리 나가서 좀 걸을까?"


재영인 늘 그렇게 말했었다. 너보다 이쁜 건 없다고.. 현진은 그게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매번 듣기 좋았다. 그리고 궁금했다.


"너 와이프한테도, 당신보다 이쁜 건 없다고 그러지?"


"아니~ 난 한 번 쓴 말은 다른 데선 안 써. 와이프한텐 당신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만 했어."


재영의 말이 현진을 위로했다. 재영의 말이 정말이든 아니든, 재영이 현진을 참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한 여자로 하여금 그녀가 한 남자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건, 남자가 여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다. 여자에게 그런 믿음을 줄 수 있는 남자는 흔하지 않다.


재영과 다시 키스를 하지 않아도, 언제까지나 재영에게 가장 이쁜 건 나일 거라는 믿음을 갖고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현진은 충분히 행복할 거 같다. 나는 재영에게 사랑받는 여자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까 저려왔던 명치끝이 말끔히 회복되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마음이 아파서 바라볼 수 없었던 바깥세상에는, 오늘이 세상의 끝날인 것처럼 매화꽃이 사력을 다해 하얗게 피어나 있었다.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현진은 생각한다.


매화꽃이 질 무렵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벚꽃이 질 무렵 장미덩굴에 봉오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장미꽃이 활짝 필 무렵, 소연과 태환이 가평 펜션에서 조촐하게 약혼식을 했다.


태환의 와이프가 지금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수가 없다고 했다. 서울에서 교사를 하고 있는 태환의 와이프는 아이들 걱정 때문에 이혼을 미루는 게 아니었다. 지금 장학사로 발령받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중요한 때다. 혹시라도 이혼이 불이익으로 작용할까 봐 태환의 와이프는 그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녀의 위치가 좀 더 견고해질 때까지 그냥 지금처럼 별거로 지내자고 제안을 해왔다. 태환의 여자관계는 쿨하게 인정하겠다고 재영과 동우 앞에서 그녀가 말했다.


태환과 소연의 약혼식에는 지난 가을 가평 펜션에 모였던 재영과 동우, 현진과 수민, 지은이 함께 했다. 그리고 지은의 네 살 연하 애인도 참석했다.


지은의 애인 역시 일 년 전 동우처럼 총각이다. 직업은 변호사다. 동우처럼 또래보다 조금 뒤늦게 시험공부를 시작한 케이스다. 지은과 한번 섹스를 한 이후로, 변호사는 모든 걸 걸고 지은에게 올인 중이다. 네 살 연상, 비전문직 따위 하등 문제 될 게 없었다. 저 여자와 남은 인생 매일 밤 섹스하며 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악조건도 타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엔 악조건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변호사는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여기고 있는 중이다. 지은은 자기를 만난 걸 행운으로 여기는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동우는 지은과의 섹스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임신을 하고 결혼식을 올린 뒤로, 선영은 얼마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매력을 점점 더 상실해가고 있다. 젊은 여자라고 모두가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동우는 여자를 나이로만 판단해선 안된다는 것을 지은에게 배웠웠다.


지은의 옆에 보통 키의 보통 외모를 지닌 변호사가 동행한 것을 보고, 동우는 질투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 오늘 지은이 올 것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동우였다. 지은은 더 당당해지고 자신감이 있어 보인다. 멋있는 여자다. 동우는 변호사의 나이를 속으로 계산해보며, 지은은 나를 완전히 잊었을까 궁금해진다. 저 놈이 나보다 잘할까, 지은을 만족시키는 놈일까 그런 게 더 궁금해진다. 그래도 지은을 만족시키는 남자는 나였을 거라고 혼자 스스로 위로해본다. 나는 적어도 두 시간은 하는 놈이다. 역시 숫자가 동우의 자신감을 상승시킨다.


소연은 외국 여배우처럼 가슴골이 깊숙이 드러나고 등이 깊게 파인 흰색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풍만한 소연의 섹시한 자태를 현진도 지은도 질투하지 않는다. 현진은 재영의 마음을 갖고 있고, 지은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수민은 어차피 저런 몸으로 태어나질 못했으나, 그래도 집에 잘난 남편과 자식이 있다. 남부럽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모두가 공평하고 모두가 행복했다. 모두가 행복해서 평화로운 밤의 달빛이 어둠 속에서 고요하다. 이렇게 아름답고 섹시한 밤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영원할 것 같은 모든 순간들이 밤에 깨어났다. 밤은 모든 착각과 모든 허위와 모든 무지들을 아낌없이 덮어주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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