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How long? 17
떡갈나무 숲속의 환타지
재영이 참나무 숲을 산책 중이다. 떡갈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등이 굵게 자라고 있어도 재영은 그들을 구분하지 못한다. 숲 속은 어느새 낙엽들로 덮혀있다.
재영이 수술한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의사가 이제 안심해도 될 거 같다고 신호를 주었다. 현진을 생각하며 수술을 하긴 했지만, 정작 마음먹고 일 저지르려니 공연히 망설여지기도 한다. 지난달 가평의 어느 참나무 숲 근처에 차를 세웠을 때, 현진의 몸이 누워있던 걸 떠올려본다. 다시 남성이 돌아오는 게 느껴진다.
현진을 데리고 모텔로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지난번처럼 어느 으슥한 숲 속으로 들어가 차 안에서 현진을 안는 게 나을지 갈피를 못 잡겠다. 현진을 데리고 모텔로 들어가는 상상은 왠지 어색하다. 재영은 차라리 떡갈나무 낙엽들이 쌓여있는 숲 속에서 현진의 여성을 만나고 싶어 진다. 자연이 주는 신선하고 풍요로운 기운 위에서 태초의 인간처럼 현진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해 본다. 누구에게나 성적 환타지는 있다.
해가 지고 아무도 없는 떡갈나무 숲 속을 그려본다. 낙엽들이 매트리스처럼 깔려 있고, 현진이 낙엽 위에 눕는 상상을 해본다. 현진이 낙엽 위에 눕는 게 싫다고 할지도 모른다. 재영이 현진의 웃음을 떠올리며 낙엽 위에 등을 대고 누워본다.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재영의 기이한 행동을 따가운 시선으로 흘깃거렸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 저들은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숲 속 연화사의 고양이가 내려와 재영을 바라보았다.
십일월의 토요일, 재영은 현진을 만났다. 떡갈나무숲 속 같은 모텔로 들어갔다. 현진이 이런 데가 처음이듯이 재영도 결혼 후 이런 데가 처음이긴 마찬가지다. 재영이 남자들 세계에서 주워들은 정보로 따진다면, 이미 몇 번 드나든 사람 못지않다. 재영이 먼저 들어가서 방을 얻었다. 곧이어 현진이 사람들이 볼세라 잰걸음으로 들어갔다. 두 번은 못할 짓이라고 현진은 생각했다. 이런 불편과 두려움을 감수하면서 재영을 은밀하게 만날 필요가 있는 건가, 현진은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재영이 방문을 열어주었다. 현진이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섰다. 임용고시 볼 때도 이만큼 떨리지 않았었다. 재영이 현진의 옷을 벗는 걸 거들어주었다. 대학시절처럼 여전히 마른 현진의 몸 위로 새로 산 속옷이 야하다. 재영의 남성이 빠르게 성장하며 현진을 침대 위로 눕힌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벗은 몸으로 만났다. 모든 사회적 관습을 벗어던지고 태초의 남자와 여자로 몸을 마주했다. 부끄럽지 않았다. 언제고 마주했어야 할 몸들이었다.
하얀 시트는 어느새 떡갈나무숲의 갈색 빛으로 물들어있다. 현진의 기다란 몸이 낙엽들 위에서 바스락거린다. 형언할 수 없는 태초의 숨소리가 침대 위로 펼쳐진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청춘이 잠시 떡갈나무 숲 속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