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How long? 15

먹는 사람

by 도라지

태환이 높이 솟은 아침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일년 전 혼자서 가평에 내려올 때, 태환은 사는 게 무의미했었다. 태환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15년 했다. 와이프는 초등학교 선생이다. 지금 와이프는 서울에서 아들, 딸과 같이 살고 있다. 아들은 고2, 딸은 중3이 되었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은 서울에서 가족들과 하룻밤을 지내고 온다.


가평에 내려와 펜션을 하고 작은 텃밭을 가꾸면서, 태환은 조금씩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내 손으로 키운 채소들을 먹으면서, '먹는다'의 의미도 새삼 깨달아가고 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태환은 그때 첫 경험을 했다. 형들한테 전수받은 작업 기술이 구태여 필요치가 않았다. 옆 집에 예쁘게 생긴 고등학생 누나가 먼저 태환을 자기 방으로 불렀었다. 태환이 초등학생 때부터 옆집에 살던 누나였다. 누나는 곧 대학생이 되었다.


첫 경험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창피했던 건지, 좋았던 건지 그때의 감정이 명확하지가 않다. 이후로 태환은 여자와의 접촉을 잡지책이나 비디오로만 하지 않았다. 태환은 이미 그때 지금의 키였다. 또래에 비해 덩치도 컸다. 여자들은 태환을 어린애로 취급하지 않고 건장한 사내로 취급했다. 태환은 싫지 않았다.


하지만 풍요가 다 좋은 것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태환에게 여자는 '따먹기 좋은 열매'를 의미할 뿐이었다. 그런 생각은 형들한테 전수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고등 2학년 어느 날 무심코 재영 앞에서 '따먹었다'라는 표현이 튀어나왔다. 재영이 정색을 하며 태환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때 태환은 재영의 의견이 옳은 것이라고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영의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태환은 그 표현은 쓰지 않았다.


그리고 텃밭 농사를 조금 지어보며, '먹는다'라는 의미의 고귀함을 가슴으로 배워가고 있다. 소연을 만나고 소연의 여성을 입으로 먹으며, 다시 태환은 먹는 행위의 의미를 깨우치는 중이다.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중이다. 오늘은 소연을 만나는 화요일이다.


삶은 의무적으로 채워가는 게 아니다. 흙을 만질 때 느껴지는 대지와 우주의 신비처럼, 매일의 시간 속에는 신비한 의미들이 숨어 있다. 서울에서 펀드 매니저로 일하며 매 순간 돈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는 알 수 없었던 우주의 비밀 같은 것들이, 삶 속에 암호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그 암호를 여는 키를 마치 소연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태환이 천안에 먼저 도착했다. 풍만하지만 허리가 잘록한 소연이 식당 문으로 들어선다. 태환이 마치 숲 속에 깊게 뿌리내린 튼튼한 나무처럼 생명이 훅 치솟아 뻗는 기분이다. 저 여자는 내게 삶의 의미를 준다. 참 신비한 일이다. 소연이 몸으로 태환에게 다가왔지만, 어느새 태환의 사람다움까지 일깨워준다. 남자다움이 인생의 의미인 줄 알았던 태환이다. 섹스가 사람다움까지 의미하는 것인 줄, 태환은 미처 몰랐었다.


소연과 따뜻한 밥을 함께 먹었다. 손을 잡고 함께 걸어서 모텔로 들어갔다. 오후 두 시다. 소연과 나의 인생이 오후 두 시에서 영원히 멈추기를 태환이 바란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여자를 알고 처음이다. 오후 두 시의 시간은 우리 인생에서 얼만큼의 길이를 차지하는 것일까? 시간은 쪼갤 수 없는 무한이며 동시에 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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