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적으로 시간이 잠들었다. 태환이 그의 팔 아래에서 깜빡 잠이 들어있는 소연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태초에 있던 것은 남자와 여자뿐이었다는 오래된 기억 같은 것이 떠오른다. 태환이 아프지 않았다면, 그대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지나갔을 인류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 비밀스러운 기억의 문을 태환이 열어버린 것 같았다. 천천히 신비한 달을 향하여 걸어가는 기분이다. 달까지 가는 길은 얼마나 먼 것일까?
동우는 엊그제 월요일 지은과의 섹스에 또다시 사로잡혀있다.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 회계사 형이 묻는다.
"동우야, 너 여자 만나지? 그것도 아주 쌈박한 여자 같은데~"
먹잇감의 정체를 모르는 채, 포식할만한 먹잇감이 있다는 정보를 들은 맹수의 눈빛처럼 형의 눈이 반짝였다.
"내가 저런 얼빠진 눈빛을 본 적이 있어서 잘 알지. 그러다가 기어이 님께서 강을 건너시더이다~"
동우도 지금 그 강물 앞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레테의 강이었으면 차라리 좋겠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동우가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그래도 자꾸만 지은이 보고 싶다. 어제까지는 '하고 싶다'였는데, 오늘은 '보고 싶다'가 되어버렸다. 미칠 노릇이다.
"형, 어디 멀리 점심이나 먹으러 가죠."
동우가 운전하는 차의 옆자리에 형이 앉았다.
"형, 사랑해봤어?"
"미친 새끼,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니가 이십대냐? 너 가지 말아라, 그 길~"
"나는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첫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건 사랑이 아니었던 것 같지 않아? 의심해본 적 없어, 형은?"
"이 새끼 벌써 돌고 있네. 인마, 의심을 왜 해? 너 세무회계일에 의심할 여지가 있어, 없어? 의심할 여지를 남기면 안 되는 게 우리 일이잖아. 인생도 의심하지 말고 그냥 살아. 이 여자가 좋으면 오늘은 얘랑, 다음에 쟤가 좋으면 걔랑~ 그게 인생이야, 인마. 이제껏 의심 없이 잘 살던 놈이, 갑자기 왜 그러는 거니?"
형이 지껄이는 이야기를 듣는데, 동우의 머릿속에 퍼뜩 뇌리를 스치는 게 있다. "의심"이라는 단어였다. 동우는 자기의 삶을 의심하지 않고 산 지 오래되었다. 젊은 시절엔 여자의 마음도 의심했었다. 이 여자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 걸까?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섹스를 하면서도 여자의 마음이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이 궁금하지 않은지 오래다. 지은의 여성에선 단내가 나는 것도 같았다. 동우의 후각과 미각이 뇌의 기억 장치에 아폴로 11호보다 더 커다란 족적을 남겨놓았다. 동우는 지금 지은의 마음이 초조하게 궁금하다.
지은은 남편과 신속하게 이혼 서류를 작성해서 법원에 제출했다. 은행원답게 남편도 손익을 따질 줄 아는 남자다. 지은이 결혼 이후 처음 꺼낸 이혼 이야기는 수정이나 철회가 불가능할 것을 알고 있다.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면 본능적으로 그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 그 남자의 여자로서 끝까지 곁에 있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도 자기 생존에 필요하다고 느끼면, 여자는 강한 남자의 아이를 원하게 된다. 지은의 남편은 지은이 그를 사랑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 다 결혼제도와 관습의 희생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