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색 우산을 든 여인과 나

by 도라지

지리적으로 대전과 나뉘는 대청댐 데크길의 경계 지점에 호수가 바라다보이는 카페가 하나 보였다. 남편과 식당에서 밥은 먹어도 구태여 카페에는 잘 들어가지 않는 우리 부부가 데크길의 경계 지점에서 되돌아올 즈음이었다.


카페에서 테이크아웃 커피 컵을 오른손에 집어 든 한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자의 오른손 팔목엔 주홍색 우산이 걸려있고, 여자는 그 오른손으로 종이컵을 들고 나오는 중이었다.


음침한 잿빛 하늘에서 한 두 방울씩 가늘게 빗방울이 떨어졌다. 종이컵에 뚜껑이 덮여있는 걸 보며, 그녀의 뒤쪽에서 걸어가던 내가 공연히 안심이 되었다.


여자가 데크길 벤치 위에 커피잔을 올려놓고 오른팔에 걸려있던 주홍색 우산을 펼쳐 들었다. 혼자서 대청호 물을 바라보며 우산을 받쳐 든 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여자의 곁을 남편과 내가 보통의 걸음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대청호 주변엔 노란색 산수유꽃이 피고 하얀색 매화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목련꽃이 봉오리를 맺은 채 누군가의 손끝에 살짝 닿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하얀색 속살을 터뜨릴 것처럼 한창 부풀어올라 있었다. 물가엔 수양버들이 야들야들한 카키색 봉오리를 내밀고 있고, 데크 길가에 벚꽃나무는 저마다 꽃봉오리를 맺기 위해 온통 생명력을 쏟아붓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름도 모르는 나무마다 새 가지가 돋아나고 줄기 끝에 새로운 생명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봄이 오는 신비로움에 한껏 취하여 경이로운 자연을 감탄하는 사이에, 어느덧 주홍색 우산을 다시 오른팔에 걸친 여인이 우리 곁을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여인의 오른손엔 아직도 브라운 색의 종이컵이 들려있고, 선글라스는 아니고 필시 안경이 분명한 글래시즈를 앞 머리에 올려 쓴 채로 여자가 강가를 걸어갔다. 네이비색의 트렌치코트 위로 사선으로 맨 핸드백과 70년대 영화배우의 헤어스타일을 연출한 그녀는 한눈에 봐도 멋을 좀 부릴 줄 아는 여자였다.


한 번도 결혼한 경력이 없어 보이는 느낌을 주는 40대 후반의 여자가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에 대청호 강가를 혼자 거닐었다. 그녀의 앞에는 20대 남녀가 재잘거리며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갔다. 데크길의 폭이 좁기도 하지만, 가끔 내 뒤에서 걷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에게 내가 말했다.


"여자가 혼자서 강가를 걷고 있을 때 남자가 말을 건네주면 참 로맨틱할 텐데, 혼자 산책하는 남자가 안 보이네~"


"저 여자한텐 아무도 말 걸지 않을지도 몰라. 얼굴은 자세히 안 봤지만, 대충 슬쩍 봐도 그래"


그 사이 남편은 남자들의 대표자로서 벌써 여자의 견적을 뽑았던가 보다. 우중충한 날에도 머리에 한껏 힘을 주고 옷도 제법 갖추어 입고 나온 여자는 어디 결혼식에라도 다녀오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자의 오른손엔 커피 컵이 들려 있고, 누군가의 눈에 띄기라도 원하는 것처럼 주홍색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가. 마음껏 멋을 부리고 혼자서 가볍게 산책을 하고, 비가 오면 쓸 수 있는 우산을 하나 가지고 있는 여인이 나는 괜히 보기 좋았다.


어제는 삼월 중순에 강원도에 폭설이 내렸다는 뉴스와 함께, 덩달아 중부권 날씨도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꽃샘추위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추운 날씨였다. 겨우내 남편과 산책을 할 때마다 남편의 장갑을 챙기곤 했는데, 어제는 미처 장갑을 준비하지 못한 채로 산책을 나갔다.


남편은 점퍼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고, 나는 내 가방에 들어있던 얇은 가죽장갑을 낀 채로 접는 우산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산책을 했다. 우산 두 개를 들고 산책하는 아줌마 눈에는, 혼자 주홍색 우산을 들고 산책하는 여자가 전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요양원에도 혼자 가서 누워있는 게 인생이다. 모두가 같은 색깔의 우산을 들 필요가 없는 것처럼 모두가 결혼을 할 필요도, 반드시 생명을 출산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삶은 모양과 형식은 다 다르지만, 우리의 인생은 모두 같은 무게 값을 갖는다. 먼지처럼 아주 작은 무게이니 값을 매길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주홍색 우산을 든 여인이 혼자 걷는 그 길을 따라서 늙은 아줌마는 양손에 3단 우산을 들고 아령을 든 아저씨처럼 양팔을 크게 휘저으며 팔운동을 하고, 남편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내 뒤를 따라온다. 이름도 모르는 주홍색 우산을 든 여인과 는, 그렇게 어제 대청호의 한 끝에서 잠시 동안 기분 좋게 봄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