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장의 커플

by 도라지

아주 오래전, 도둑이 가끔 드나들었던 대학가 주택의 이층 전세방에서 한 살배기 큰 아들이 색이 바랜 누런 장판 위를 기어 다녔다. 일층과 이층을 분리해주는 이층 난간의 높이가 하도 얕아서, 아래층을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몸이 떨어질 수도 있을 거 같은 위태로운 집이었다. 작은 아파트 전세금까지 빼서 남편의 사업자금을 마련하느라고 둘째를 임신 중이었던 나는 기어 다니기 시작한 첫애를 데리고 값이 싼 대학가 근처 방으로 이사를 했었는데, 그게 벌써 이십오 년 전 일이 되었다.


그 시절에 비한다면야 지금 우리 집은 부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얼마의 돈이 모아졌기에 어제는 은행 대출받은 걸 일부 상환하려고 남편의 새로 구입한 플립폰에 은행 앱을 실행하던 중 막혀서, 통장 재개설을 위해 오늘은 오전 일찍 남편을 따라 집을 나섰다.


"아니, 내가 초딩도 아니고 통장 하나 만드는데 당신이 왜 따라가?"


남편이 눈을 부릅뜨며 날 선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아이고, 이런 걸 가지고 뭘 그리 기분 언짢아하고 그래요? 원래 경리들이 은행업무도 대신하고 그러는 건데요~ 이게 통장 개설만 해서 될 게 아녜요. 인터넷뱅킹도 신청해야 하고 공동인증서 가져오기며, 모바일 오티피 등 처리할 게 좀 있어요. 내쪽에서 먼저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은행 직원도 저 고객이 어디까지 무슨 용도로 필요한 건지 몰라서 처리가 미흡할 수 있거든요. 내가 따라갔다가 아예 당신 폰에서 대출상환되는 것까지 한번 확인해보려는 거니까,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우리는 일상에서 가끔 사소한 부분을 놓치거나 해서 두 번 발걸음 해야 할 때가 생기곤 한다. 나는 되도록이면 한 번에 완성도 있게 일처리 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 성격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은행업무의 시스템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시스템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남편과, 남편을 상대할 은행 창구 직원이 누구냐에 따라 사소한 이 일에서도 차등이 생길 수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은행에서 번호표를 뽑아 들고 은행 안으로 들어서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차례가 되자 남편이 창구 앞에 등받이가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긴 내가 앉아야지, 당신은 이 옆에 앉아."


남편이 창구 여직원과 플라스틱 칸막이를 마주하고 메인 의자에 점잖을 떨며 앉았다. 등받이가 없는 작은 원형 모양의 스툴에 앉아 있던 내가 창구 쪽 여직원을 향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난 뒤 남편이 여직원이 내민 서류를 몇 장 작성하는 사이, 여직원이 추천해 준 앱을 내가 다시 남편 폰에 깔고 실행해본다.


"추천해주신 앱에는 대출상환이 안 보이는데요~"


이십 대 후반은 족히 되어 보이는 여직원이 옆 창구의 남자 직원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고, 공동인증서가 필요한 다른 앱을 설명해주었다. 바로 이런 데서 직원들도 사소한 차이가 있음을 우리 나이가 되면 예측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어찌어찌해서 내가 원하는 수위까지의 일을 마치고 남편이 나를 아파트 정문 앞에 떨구어 주었다.


남편과 일을 할 때면 내 이름으로 된 일을 혼자 처리할 때보다 몇 배의 수고가 더 들어가곤 한다. 남자 자존심까지 부리며 수긍하려고 들지 않는 경우마저 발생하기도 해서, 그것까지 설명하고 구슬리느라 불필요한 에너지를 깡그리 소모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 덕에 나는 세상 물정을 뭘 좀 아는 아줌마가 되었고, 인내심에선 국가대표급이며 덩달아 정신력도 상승된 꼴이 되었다.


이렇게 우리 집은 겉보기엔 잘 드러나지 않는 조금 난감한 구조로 굴러가고 있다. 그래, 이것 역시 시스템을 이해하는 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람에게도 각자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남편의 시스템을 거의 이해하고 있는 축에 속한다. 이해력과 인내심이 큰 쪽일수록 상대방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포용하게 되므로, 일종의 함수 관계가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의 이해력과 함수 관계는 비단 우리 집만의 문제는 아닌 거 같다. 며칠 전 MBC 모 프로그램에서 나온 한 여성과 한 남성 기자의 전화 통화 내용을 들으며, 우리 집의 난감한 시스템과 비슷한 집이 저기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여성은 그녀의 남편을 "우리 집 아저씨"라고 표현했는데 그마저도 나와 똑같았다. 우리 집만 환장의 커플이 아니구나 싶었다.


사람의 언어체계는 반드시 의식체계를 수반한다. 그녀의 의식은 이미 남편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악하고 있는 수준으로 느껴졌다. 공무원들에게는 그들 스스로만 모르는 공통되고 일관된 자존심이라는 어리석음이 유전자처럼 흘러 다니고 있는데, 그 몹쓸 자존심은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수많은 학생들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 사회 현실이 그걸 반증해주기도 한다. 미스터 윤도 공무원들의 공통된 유전자로부터 예외는 아니다.


낯선 남자와 전화 통화를 참 길게도 하고 있던 그녀는, 인류의 반이나 되는 '남자'라는 시스템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녀는 미스터 윤이라는 한 남자를 파악하기 이전에, 이미 '남자'의 시스템과 속성과 기능을 속속들이 간파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동네에서 이웃해서 살면 참 재밌을 큰 가게 여주인의 인상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쭙잖게 파악하여 끼어들고 있는 정치와 국가 시스템에 대한 의식체계가, 단지 도사님들과 어울려 시답잖게 정치를 떠벌리는 한 판의 굿 같은 이벤트에 그칠까 나는 그것이 두려워지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가 잘하는 영역이 있다. 그녀는 모르는 남자들과 어울리며 "누님, 동생" 하는 관계 맺기에 매우 타고난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매우 잘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세계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우리 민중의 세계와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아무도 존경하지 않는 권력에 대한 욕망과 쓸모없는 자존심으로 가득 찬 미스터 윤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재산을 증식하는 데 활용하는 것까지만, 그녀가 모든 거짓을 작동해주기를 바란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우리들의 삶 속에 그들이 단 한 발짝도 끼어들면 안되는 이유를, MBC가 임팩트있게 구성하거나 길게 편집하지도 못한 전화 통화에서나마 그녀는 온전히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그녀를 미세스 윤이라고 불러야 좋을지 줄리 킴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지 세상은 아직도 답을 주지 않고 있고, 깊어져 가는 겨울 추위에 운동 부족 아줌마는 속이 더부룩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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