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나투스와 졸혼

by 도라지

지금부터 삼십 년 전에, 우리 부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두 개의 신체와 두 개의 정신이 만났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꽂힌 방식은 요즘 버전으로 엄밀히 따지면 스토커에 가까웠지만 어찌어찌 인연이 되어 우리는 아직까지 부부로 살고 있다. 그 당시 가진 거라곤 뭐 하나도 정말 없었던 남편은 삼십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삼십 년 전보다 더 멋진 신체와 정신 그리고 부부 공동명의의 집 한 채를 갖게 되었다.


삼십 년 전보다 더 멋진 신체와 정신을 갖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지난(至難)한 삼십 년 세월 동안 남편의 신체와 정신이 발전하는 사이, 나는 고스란히 세월의 무게를 두 배로 떠안고 산 셈이다. 우주에 작용하는 법칙 가운데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나의 남은 인생은 꽃길만 걸어야 마땅할 판이다. 하지만 총량의 법칙이 따박따박 맞게 떨어진다는 보장이 없는 게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나는 충실한 학생처럼 이미 다 배워버렸다.


결혼 생활 이십육 년이 넘는 동안 자질구레한 일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머리 쓰는 일은 주로 나의 몫이었다. 요즘 들어 마누라가 머리가 아프다는 호소를 자주 하게 되면서, 평생토록 머리를 많이 쓰지 않아 두뇌가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남편은 조금씩 독립적인 호모 사피엔스 인간형으로 진화 중이다.


어제는 비가 잠시 그친 틈을 타서 청주대학교 캠퍼스 산책을 하다가 이혼과 졸혼 이야기가 나왔다. 집에서 남편 사무실 일을 거들면서 살림이나 하고 있는 마누라를 무능력한 인사로 취급하고 있는 남편은, 철학 강사라는 직함은 지구 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강사라고 해봐야 파트타임 수입이니, 남편 앞에서 내가 브런치 작가라고 나를 당당하게 고백할 수 없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마누라가 남편 사무실과 별개로 확실한 직업이 없다는 것을 빌미로 이혼도 못하는 겁쟁이 아줌마로 못을 박고 사는 남편은, 마누라가 다 자기 덕분에 먹고 산다고 으스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그런 생각들이 물론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맞는 것도 아닌 까닭은, 나는 매우 작은 생활비로도 충분히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소탈한 인생관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기 마누라의 가치관과 생활태도를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남편은 마누라 기를 죽여서라도 저렇게 자기의 공적을 인정받고 싶어 안달이다. 나는 졸지에 이혼도 못하는 무능하고 늙은 아줌마가 되었다.


이혼할 능력도 못 되는 마누라인 내가, 육십 넘어서 졸혼하는 부부들이 있다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남편에게 물었더니 남편은 절대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그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결국 남편 입에서 나온 대답은 마누라의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외로움과 불편함 등등이었다.


들뢰즈라는 현대 철학자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로 유명한 근대 철학자 스피노자를 "신학으로부터 철학을 구출해 낸 철학자들의 그리스도"로 칭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자유'를 향한 스피노자의 철학과 그의 삶이 온전히 윤리적으로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던 스피노자는, 사상과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서 예속을 벗어난 자유의 철학을 주장한 대가로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채 평생을 홀로 렌즈를 세공하는 일을 하며 살았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제안한 교수 초빙을 거절한 유명한 일화 또한 그가 어떠한 형태로든 예속된 삶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자유를 향한 삶의 여정만을 추구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예속'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빠져드는 예속의 상태는 자기 모습대로 신을 '상상'하는 데서부터 기인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양 넓은 의미에서의 미신에 빠져 있는 까닭은, 상상이 아니라 지성을 통해 적합한 원인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합리적 질서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신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자연 안에는 사물들의 질서와 관념들의 질서가 존재하는데, 스피노자는 이들 두 개의 합리적인 질서를 신체가 공간을 차지한다는 개념으로서의 '연장(延長)'과 지성적인 힘을 발휘하는 정신의 '사유'로서 제시하고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특정한 타자와 마주할 때 기쁨을 느낄 수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어떤 타자와 마주할 때는 슬픔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러한 감정의 변용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기쁨을 느끼는 것은 코나투스가 증가되었음을 표현하는 것이며, 슬픔을 느끼는 것은 코나투스가 감소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코나투스를 증가시키는 타인, 즉 자신에게 기쁨을 생성케 하는 타자와 만나고 연대하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 누군가 이 기쁨의 연대를 방해할 때, 사람은 분노하게 되고 스스로 고통받게 된다. 우리가 나이 들어가면서 졸혼이나 이혼을 더욱 깊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코나투스의 작용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부부로 살면서 서로가 분노하게 되고 자꾸만 슬퍼지는 관계라면, 인간 실존의 본질에 역행하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본질은 실존 속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으로서 코나투스를 증가시키는 것, 다시 말해 기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집 남편은 마누라와 살면서 코나투스를 증가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집 마누라는 코나투스가 점점 감소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는 이 신비한 원리는 무엇일까?


늙어가는 부부가 산책을 하는 캠퍼스에, 키가 큰 나무 위에 앉아있는 까치가 목청껏 울어대고 있었다. 봄이 오면서 까치도 산란기를 맞으며, 수컷이 암컷을 부르느라 저리 씩씩한 소리를 내는 거라고 남편이 말했다. 자기가 보기엔 무능하고 늙은 마누라지만 혹시나 저 마누라를 부르는 수컷이 어딘가에 있는 건 아닐까, 신체와 정신이 진화 중인 남편이 의심 어린 눈초리로 마누라를 쏘아보았다.


그 집 마누라는 그녀를 경제력으로 '예속'시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남편의 사유 체계에 동의하지도 않거니와 굴복하고 싶지도 않은 거뿐인데 말이다. 산란기도 거의 끝나가는 늙은 마누라를 불러내는 다른 수컷이 있기라도 한다면, 나의 코나투스는 과연 증가할까? 이 나이에 두 개의 신체와 두 개의 정신이 마주할 때 기쁨이 생성되는 경우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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