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는 봄길을 따라 우리는 무작정 남쪽으로 차를 달렸다. 남원 광한루 앞으로 흐르는 요천 가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색 벚꽃이 요란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나무는 사람들에게 이번 주말에 만개하겠다는 소식 한 마디 전한 적 없건만, 사람들은 멀리서부터 활짝 피어난 꽃 향기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산책로를 가운데 두고 양쪽 길가로 즐비하게 늘어선 벚꽃나무들은 작년에도 보았지만 또다시 보아도 혀를 내두를 만큼 장관이다.
우리 부부는 벚꽃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요천가의 벚나무를 바라보며 조금 늦은 점심을 먹고, 별 다른 말 없이 그 길을 따라 함께 걸었다. 가끔 부모의 손을 놓은 어린아이가 벚꽃 나무 아래에서 혼자만의 꽃놀이에 빠져있으면 아이가 부모와 다시 만나는지 확인을 하느라 잠시 길을 멈추었고, 젊은 커플들이 길 한가운데 카메라 거치대를 세워놓고 포즈를 취할 때면 그들을 기다려주느라 다시 길을 멈추어 서있을 뿐이었다.
젊은 남녀들이 모두들 영화 속 주인공처럼 한껏 멋을 내고 꽃길 위를 걸었다. 이십 대 여자애들의 긴 머리카락이 따스한 봄바람에 싱그럽게 날리고, 주인 손에 이끌려 목줄을 매고 산책 나온 강아지의 손질 잘된 머리털이 하얀 귓볼 위에서 기분 좋게 바람에 스치며 날렸다.
우리는 차를 달려 남원 허브밸리를 찍고 지리산 정령치 휴게소 주차장에 도착했다. 지난해 여름의 끝무렵에 우연히 닿은 정령치에서 겨울 같은 매서운 추위를 경험했던 짜릿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령치에서 팔랑치로 넘어가는 산길을 둘이서 말없이 또 얼마 동안 걸었다.
어머니 품 같은 지리산이라 할지라도 고지대의 산길에선 언제나 매서운 바람을 예상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누라가 슬쩍 건넨 장갑을 낀 남편이, 늙어가는 마누라가 앞서 걷는 가파른 고갯길을 뒤따라 걸었다.
정령치 주차장을 벗어나 다시 차를 몰고 노고단 휴게소를 지나 천은사를 지나쳐 구례 화엄사 입구까지 올라갔다. 화엄사로 들어가는 마산면 일대에 우뚝 선 벚나무들도, 오후의 남은 햇살이 사라지기 전에 상춘객들에게 자신들의 화려함을 발산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해가 서쪽으로 자리를 옮긴 오후 시간인데도, 구례에서 하동으로 가는 길 위에는 차들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도로 위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가는 도로가에 펼쳐지는 벚꽃나무의 행렬과 그 위용을 감상하려는 상춘객들의 끈질기게 설레는 차량 행렬 때문에, 벚꽃이 피는 주말에 펼쳐지는 이 도로 위의 상황을 익히 알고 있던 우리는 도로 위에서 다시 차를 급하게 돌려 구례읍 서시천으로 향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서시천 물가에 피어난 벚꽃나무들은 마지막 남은 햇살을 줄기마다 빨아들이며, 봄날 저녁 밀려오는 어둠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듯이 못내 아쉬운 마음을 바람결 따라 연약한 꽃잎에 실려 보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들이 왜 연약한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눈물이 나게 고운 풍경 앞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혼자였던 것도 같다. 삼십 년 동안 해마다 이 남자와 벚꽃 길을 함께 걸었지만, 어제는 문득 내 옆에서 봄날 오후의 차가운 바람에 어깨를 움츠린 사내 한 명이 서있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휴게소에서 우동을 한 그릇씩 먹고 까만 밤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 부부는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추 늙은 마누라가 남편에게 사람은 행복을 주는 사람, 믿음을 주는 사람, 고통을 주는 사람, 이렇게 세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특별히 따뜻한 말이나 애정 어린 포옹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가족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은 못되겠지만, 남편은 마누라를 가족들에게 믿음과 편안함을 주는 사람으로 선뜻 인정해주었다.
내가 남편과 자식들에게 믿음과 편안함을 주는 사람으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상대적으로 남편은 나에게 고통을 많이 준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가족에게 의도적으로 고통을 주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나, 우리는 여러 상황과 이유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 상처와 고통을 받기도 한다.
지난 삼십 년 세월을 견디는 동안, 내 영혼은 마치 툰드라의 영구동토층처럼 차갑고 깊숙한 빙하가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와 티브이를 켜는데 sbs에서 툰드라를 방영하고 있었다.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로 언제부터인가 툰드라 지역의 영구동토층이 녹고 있다고 한다. 툰드라의 영구동토층 해빙은 토양에 축적된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를 배출하는가 하면, 땅속에 잠들어있던 고대 바이러스까지 깨어나고 있다고 했다. 땅 속에 묻혀 있던 순록의 사체 속에 있던 탄저균이 75년 만에 되살아나서 어린아이의 생명뿐 아니라 25만 마리의 순록들이 살처분되는 비극이 일어났다고도 한다.
툰드라의 영구동토층 해빙은 자연생태계 파괴는 물론 인간들의 삶의 변화마저 초래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로 대응해야 할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다.
나의 영혼은 툰드라의 영구동토층처럼 영원히 녹지 않을 것만 같은 빙하가 되어 꽁꽁 얼어붙은 지 꽤 오래되었으나, 툰드라의 영구동토층도 해빙되는 마당에 내 영혼의 영구동토층 같은 상처도 해빙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러다가 영구동토층에 깊숙하게 잠들어있던 고대 바이러스 같은 원초적 본능이라도 깨어나는 것은 아닐까?
남편은 이제 마누라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되려고 남몰래 다짐하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을 보니, 내 영혼도 해빙기에 접어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 종일 운전하느라 고생한 남편이 늦은 밤에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눈물겹게 아름다운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고, 따뜻한 봄이 저절로 무르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