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by 도라지

바닷가 모래사장을 연상시키는 세종호수의 작은 은빛 해변가에 청춘 남녀들이 쌍쌍이 앉아있다. 공원 내 규칙에 위반되는 행위일지도 모르겠으나, 불꽃이 소박한 폭죽을 몇 차례 터뜨리는 커플도 있었다. 집을 나와서 혼자 이 공원을 어슬렁거린 지가 벌써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호수공원에서 바라다보이는 신축 고층 아파트 뒤로 붉은 해가 천천히 기울고, 하늘은 이내 진청색의 청바지보다도 더 짙게 물들어가고 있다. 작은 우주선들이 줄을 맞춰 비행하듯이 공원 가로등에 일제히 불이 켜지고, 수상무대가 물 위에서 색깔을 바꾸며 꽃송이처럼 피어났다.


필경 잠자리를 찾아 이동하는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새 두 마리가 큰 날개를 퍼덕이며 이미 검게 보이는 숲으로 바삐 날아갔다. 앞에서 날아가는 새 한 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뒤에서 따라가는 새 한 마리가 연신 큰 소리를 내며 앞선 새의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묵묵부답으로 제 갈 길을 가는 남편을 뒤따르며 불만을 토로하는 여자처럼, 뒤에서 날갯짓을 재촉하던 새는 앞서가는 새의 뒤를 바짝 따라붙을 때까지 계속 소리 내어 구시렁거렸다. 새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앞서 날던 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마치 흔하게 보는 부부의 모습 같아서, 혼자 집을 나와 공원에서 세 시간을 버티고 있는 아줌마 입에서 공연히 웃음이 흘러나왔다.


요즘 무에타이 도장에 새로 등록을 하고 운동을 시작한 남편은, 주중엔 도장에서 운동하느라 주말마다 오전에 골프 연습장에 나가고 있다. 오전에 연습장에 다녀와서 피곤했는지 남편이 점심을 먹고 소파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다.


괴산 쪽으로 꽃구경을 가자느니 하더니만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잠에서 깬 남편이 옷을 입고 현관문을 나서다가, 음식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고 따라나서는 나에게 신경질적으로 한마디 하였다.

"나갈 때마다 뭘 그렇게 어물쩡거려?"


세상에, 음식 쓰레기는커녕 분리수거조차 하지 않는 사람 입에서 나올만한 소리는 아닌 거 같았다. 그것은 '나가고 싶지 않은데 내가 착한 남편이라 나가 주는 거야'라는 속마음의 표현이 분명해 보였다.


매 주말마다 마누라랑 산책을 다니는 것을 뭐 대단한 선행이라도 베푸는 것처럼 유세 부리는 남편을 보기 좋게 거절하고 혼자 차를 몰고 세종까지 나왔다.


그동안 내가 너무 고분고분 등신마냥 집에만 있었나 보다. 누구는 운전을 할 줄 몰라서 집에만 있는 게 아닌데, 너무 오랫동안 남편 하고만 시간을 보냈나 보다. 부부란 누가 누굴 배려하는 차원에서 시간을 내주는 것이 아닌데, 남편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들도록 너무 함께 붙어 있었던 내가 더 모지리였다.


사물들의 경계가 무너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공원의 불빛들만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집 나온 지 이제 네 시간이 되어간다. 어둠이 내려앉은 호숫가에 일렁이는 봄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늙어가는 아줌마가 코를 훌쩍이며 호숫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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