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인 인간

by 도라지

몇 해전 철학의 이해 수업에서 교수가 물었다.


"여러분은 여러분 어머니가 미학적인 인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그 수업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벗어나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을 위한 강의였다. 철학과 학생들에겐 필수 과목이며, 다른 과 학생들은 교양과목으로 신청이 가능했다. 그때 나는 막 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였다. 이십 년도 훨씬 전에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었기에, 나 역시 대학원생이긴 해도 학부 재학생들처럼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학점이 있었다.


나를 담당했던 교수는 나와 몇 살 차이가 안나 보였지만, 내게 특별히 학부 이수학점을 최대한으로 잡아놓았다. 그 당시엔 왜 꼭 이래야만 했을까 의문도 들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진심으로 날 위한 배려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 교수의 강의 시간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1학년 신입생들이 순간 당황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모두들 각자의 어머니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마트에서 캐셔하시는 어머니, 우체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시는 어머니, 양계장을 운영하시는 어머니, 조그만 밭을 일구시는 어머니 들을 떠올리며, 학생들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 교실에 앉아있는 학생들의 어머니뻘 되는 나도, 그 질문에 우리 집 아들들의 어머니를 떠올려 본다. 교수가 몇 장의 명화를 스크린에 띄우며 말했다.


"우리는 미학적인 인간은 무언가 특별하거나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동자나 고아들, 혹은 우리가 매일 보는 어머니들은 마치 미학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인식하기 쉬운데요, 자, 여기, 그림들을 봅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밀레의 <만종>이란 작품입니다. 옆에 그림 <이삭 줍는 여인들>에서와는 또 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다른 그림을 한번 봅시다.

에스파냐의 무리요라는 작가의 작품입니다. <포도와 멜론을 먹는 소년들>이라는 제목의 작품인데요, 여러분은 이 소년들이 불행해 보이나요, 아니면 행복해 보이나요? 낡은 옷에 무릎엔 구멍이 나서 찢어지고, 신발도 없이 맨발로 발바닥이 더러운 걸 볼 때, 아마도 집이 없거나 거지 소년들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겠죠?"


또 다른 작가가 카메라로 노동자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작품들도 몇 점 본 기억이 있지만, 지금은 작가의 정확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스크린을 통해 비추어 본 그 작품들을 통해서 내게 전달된 느낌만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


오늘 불현듯 그 수업이 떠올랐다. 우리 집 아들들도 그리고 남편도, 나를 한낱 주부이며 나이 든 아줌마 정도로 여기고 살 것이다. 그래, 틀리지 않다. 하지만 니들 엄마이며 당신 마누라인 나도, 때로 미학적인 인간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매일 매 순간 나의 감성이 미학적 인간으로 발현된다면, 그것은 당사자인 나 역시 골치 아파서 사양하련다. 그래도 어느 한순간 갑자기 센티해지는 그런 날, 그런 시간이 드물게 찾아오기도 한다는 걸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오후에 빨래를 널면서 휴대폰으로 켜놓았던 오래된 팝송을 듣는데, 순간 마음이 간질간질거린다. 어딘가 가슴 한가운데쯤이 괜히 저린 듯 사무치기도 했다. 누구라도 만나서, 평소엔 먹지 않는 매운 소주라도 덜컥 마시고 싶어졌다.


이런 마음 누구에게라도 들킬까 봐, 음악을 끄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아직도 비대면과 대면을 섞어가며 강의를 듣고 있는 대학생 작은 아들이, 엄마라는 사람의 존재는 잊은 채 서둘러 집을 나간다. 밖에서 저녁 먹고 온단다. 남편은 라운딩 후 간단히 저녁을 하고 오겠다 하고, 큰아들은 오후 근무를 나갔으니 밤 열 시에나 들어온다. 다 나갔다.


말일이라 남편 사무실 일을 집에서 노트북으로 처리하고, 한가로운 오후 시간이다. 서로 늙어서 이제는 술 먹자고 찾는 사람들도 없고, 소주는 집에 없고, 캔맥주랑 컵라면이나 먹어야겠다. 알싸하게 취하면 더 멜랑꼴리해질 수도 있으니, 오늘은 딱 캔 하나면 충분히 행복할 것 같다. 캔맥주 하나와 컵라면, 그리고 휴대폰으로 흘러나오는 올드팝 몇 곡을 들으며, 나는 다른 어머니들처럼 어느 순간 온전히 미학적 인간이 되어본다.


(2021년 9월 30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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