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 어머니는 위에서 용종 하나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며 대학병원에 이틀을 입원했었다. 젊은 사람들에게야 간단한 시술이라지만, 늙은 어머니에겐 그조차 무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위를 건드렸으므로 죽 같은 것 위주로 식사를 하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식사량이 줄어든 탓인지 어머니는 급기야 겨울에 이르러선 혼자 일어나 걷지를 못하셨다.
그 겨울에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던 중년의 두 딸들은 한 달 간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삼십 년 묵은 조현병을 앓고 있었기에, 거동이 불편해진 어머니가 더 이상 딸들을 거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머니는 그때도 여전히 언니들의 입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나마 멀쩡한 두 자식(오빠와 나)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지난봄이 올 때까지도 걷는 게 여의치 않았다. 나는 동사무소에서 대여한 휠체어에 어머니를 태우고 동네 병원에 영양제 주사를 맞으러 다녔다. 그즈음부터 부모님 댁 살림은 어찌할 수 없이 거의 내 차지가 되어버렸다. 어머니의 상태가 타인의 적극적인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판단한 국가가 요양보호사를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하였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정중히 사양하였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부모님 댁 빨랫감을 집으로 가져와 세탁을 한다. 어머니의 신체 기능이 저하되면서 어머니의 옷에는 갖은 모양의 얼룩들이 여러 개 생겨났다. 물론 빨래야 세탁기가 돌린다지만, 세제를 묻혀 얼룩들을 일일이 손으로 비빈 뒤에 세탁기를 작동시키는 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늘 소요되었다.
부모님의 옷가지들을 세탁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엔 부모님의 속옷을 새로 샀다. 그리고 봄과 여름을 지나며 가벼운 티셔츠들을 하나씩 사게 되었다. 그러다 낙엽이 지고 하루아침에 추위가 찾아오면서, 요즘엔 다른 어르신들의 외투를 유심히 보게 된다. 매주 수요일마다 막내딸과 외식을 하는 부모님의 옷이 더럽거나 너무 누추한 것은 아닌가 신경이 쓰이는 것은 내 몫이다.
올 겨울 추위에 대비하여 아버지 겨울 점퍼를 새로 하나 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장암 수술 후 다시 발견된 전립선암 때문에 약을 꾸준히 들고 계시지만, 아버지의 신체 활동력은 매우 양호한 편이라서 점퍼에 달린 지퍼를 혼자 올리고 내릴 만큼은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 비한다면 신체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편이다.
어머니는 지퍼로 채우는 점퍼보다는 버튼이나 단추로 여미는 타입의 옷이 더 적합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사려고 보니 단추 타입의 겨울 점퍼를 고르는 것 또한 쉽지가 않았다. 기어이 어머니 점퍼는 사지 못하고 아버지 점퍼 하나만 사들고 돌아왔다.
그날 아침도 어머니 옷들의 소매와 앞단에 묻은 얼룩들을 제거하느라 온통 빨래에 신경을 쏟고 있던 때였다. 작가 한강이 메디치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텔레비전에서 들려왔다. 아침 뉴스에서 흘러 다니는 여러 소식 중에서 유독 그 소식만이 내 귓속에 들어왔다. 주방 쪽에 있던 내 몸이 자석처럼 거실 쪽으로 옮겨가 텔레비전 앞에 멈추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 비치는 그녀의 얼굴에선 깊은 고뇌와 사유의 흔적들이 역력하였지만, 어쩐지 결혼제도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 댁 빨랫감들을 망에 넣어 세탁기에 집어넣고는 얼른 작가 한강을 검색해 보았다.
나는 그 무렵 보름이 되도록 글 한 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부모님 핑계를 대기에도 어딘가 너무 허술하였지만, 나는 내 삶에 그냥 지쳐있었을 것이다. 부커와 메디치는 고사하고 브런치에서 오늘의 작가로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내가 속한 결혼제도와 내 늙은 부모의 탓도 아닌데 나는 바깥에서 애꿎은 구실을 찾으려 했나 보다.
작가가 글을 잘 쓰는 데 결혼제도라는 테두리의 여부가 관건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그날 아침 작가 한강의 얼굴에서 가족이라는 굴레에 갇혀있을 것 같지 않은 한 인간을 보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세탁기에서 빨래가 다 되었다고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