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부분 심장이 흉부 쪽에 있다고 생각한다. 심장이 흉부 즉 가슴에 있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공론화된 비유처럼 "누구에게나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인생의 십자가가 주어진다"는 논리에 어느 정도 근접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극도의 공포와 불안이나 슬픔에 오래도록 노출되어 견뎌온 사람들은, 가슴이 아니라 저 아래 복부 언저리에서 쿵쾅거리며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밤잠을 설치게 되는 불면의 날들을 경험하게 되곤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원래 심장의 위치가 마치 복부 왼편에 위치해 있던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이 크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새벽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 밤들은 늘 불안하고 두렵고 그리고 외로웠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밤, 단순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없다거나 함께 밤길을 산책할 누군가가 없기 때문에 느껴지는 고립된 섬으로서의 외로움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세상에 하나의 인간으로 던져지고, 그 삶의 시간들을 오롯이 내 신체 속에 들어있는 정신으로서 견뎌내야만 하는 존재로서의 고독한 외로움이었다. 그런 밤이면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가 종종 떠올랐고, 신화 속 "시지프스"의 모습 속에 나의 얼굴이 덧입혀지고 마침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에 도달하곤 하였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의 언니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어느 순간에라도 금세 죽음의 문턱에 다다를 것만 같은 어머니를 돌보며 이번 겨울은 영겁의 세월을 지난 듯이 허무하고 처량하였다. 내 삶이 쓸쓸하고 고달파서 허무하고 처량맞은 게 아니었다. 혈육들에 대한 지독한 애정 때문만도 아니었다. 슬픔과 고통에 찬 나의 마음은 끝도 없이 추락하였고 붕괴되고 있었다.
그래서 며칠 전에는 세상을 향유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지인들과 어울려 술도 마셔 보았다. 그들이 설정해 놓은 세상에는 언제나 파릇하게 새싹들이 돋아나고 향기로운 꽃들이 피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 역시 오히려 일종의 부조리와 비합리성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들의 가슴속에 피어나는 억제되지 않은 욕망을 마주하며 나는 이따금 인간 실존의 가벼움을 목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라도 너무 쉽게 찢어버리기에 적합한 그들의 욕망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베일이 차라리 싫지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향유주의자들과 함께 나눈 술잔도 나의 추락한 마음을 위로해주진 못했다. 그래서 이번엔 까뮈를 찾아 도서관엘 갔다. 동네 작은 도서관에 두 권뿐이었던 까뮈의 이방인은 모두 대출 중이었다. 그를 대신하여 보를레르가 눈에 띄고 다시 사르트르에서 나의 시선이 멈추었다. 까뮈의 뫼르소를 다시 만나러 갔던 날, 예정에 없던 사르트르 책 한 권을 빌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사르트르의 <말>을 집중해서 읽는 동안 아주 잠시나마 나의 머릿속에서 혈육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지만 책장을 덮으면 내 고통과 슬픔의 출처가 되는 바로 그 얼굴들이 다시 살아났다. 오래도록 보고 싶어지는 그리운 얼굴들이어야 마땅한데, 내 마음속에 한없는 슬픔과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을 나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자식 놈들 먹일 밥을 하고, 나도 무엇이든 먹어야만 했다. 자식들은 그냥 살아만 있어도 고마운 얼굴들이다. 언니들이 정신병원에 있어도, 늙으신 부모님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두 분만 따로 지내셔도, 그 얼굴들의 입 속에 오늘 당장 먹을 것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로 하였다.
가족들이 먹은 밥그릇들을 깨끗이 닦아두고, 작은 침대에 혼자 누워 법륜스님과 법정스님의 콘텐츠를 들어본다. 내 심장이 가슴 쪽으로 조금씩 제 자리를 잡아가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