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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Feb 14. 2024

어떤 설날 준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매일 삼시세끼 식사를 거르지 않는 어머니는 간신히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눕기 바빴다. 식사 후에 바로 눕는 건 건강에 해롭다고 누차 말씀드려도, 앉아있기조차 힘든 어머니는 금세 자리에 눕곤 하였다. 몇 달 사이에 어머니의 체중은 급격히 늘어났는데, 불어살덩이란 것들은 주로 어머니의 배에 달라붙어서는 산더미처럼 출렁거렸다.


자꾸만 자리에 누워계시는 어머니가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던 아버지는 자식들과 상의도 없이 급기야 위내시경 검사를 예약해 두었다. 검사 결과 다행히 어머니의 뱃속엔 큰 이상은 없었다.


어머니는 노인용 기저귀 특대형을 쓰고 있다. 비록 어머니의 얼굴과 팔과 다리는 볼품없이 비쩍 말랐지만, 출렁거리는 뱃살만큼은 다른 노인들에 비한다면 가히 일등일 것이다. 어머니의 뱃살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노인의 몸 어디에라도 살이 있다는 건 어찌 보면 아주 나쁜 것 같지만도 않았다.


설날 명절을 앞두고 집에서 욕조에 물을 받아 어머니를 목욕시켜 드렸다. 어머니의 접혀있는 뱃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계곡들이 몇 개 줄을 긋고 있는 아래로, 늘어진 뱃살 때문에 복부와 다리를 구분 짓는 샅은 보이지 않았다. 치매가 없는 어머니는 여전히 자존심을 부리시며 항문 쪽엔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다.


목욕을 하고 새로 세탁한 옷을 입으면 누구라도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따뜻하게 밥 먹고 이부자리에 누울 수만 있어도 가끔 인생은 그것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어머니는 목욕을 시켜드리고 자리에 누우면 요즘 그런 표정을 지으신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제는 정신병원에 있는 딸들을 면회하러 갈 수 있을 만큼 기력이 없는 것 같았다. 왕복 세 시간 거리를 운전하는 막내딸에게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는 말씀만 주실 뿐이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새언니가 바리바리 음식을 장만해서 병원에 가져왔다. 병원 면회실에 화사하고 정갈한 식탁이 한 상 차려졌다. 누가 봐도 명절을 앞두고 "있는 집"에서 크게 한상을 차려낸 그런 상차림이었다.


언니들은 환자복 위에 점퍼를 하나씩 걸치고 면회실로 내려왔다. 큰언니는 가벼운 인사말을 던지고는 탁자 위에 차려진 음식부터 먹기 시작했다. 뒤이어 면회실로 들어선 작은 언니가 반가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으며 큰언니의 안부를 물었다. 언니들은 서로 다른 병동에서 생활 중이었다. 나무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든 작은언니가 내 입 속에 먼저 음식을 넣어주었다. 언니가 집어준 음식이 내 입속에 들어오자 내 눈에서 뜨거운 물방물이 소리 없이 굴러 내렸다.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함께 오지 못했다는 말을 전하자, 큰언니는 자꾸만 아이처럼 퇴원시켜 달라고 떼를 썼다.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을 돌봐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 수 없는 이유를 아이에게 가르쳐주듯이 자분자분 일러주었으나, 어차피 우리의 대화는 허공 중에 흩어지는 먼지와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병원에 가기 전에 옷가지를 몇 벌 준비했었다. 환자들 옷을 공동으로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시스템이라서, 속옷이며 겉옷에 모두 이름을 적어 보내곤 하지만 한 철이 지나고 나면 보내준 옷들이 사라지고 없기도 하였다. 그래서 계절이 새로 돌아올 때마다 옷가지를 다시 준비해 가곤 했다.


준비해 간 옷가방을 아직 열어보지도 않았는데, 마주 앉아 있던 작은 언니가 갑자기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서 내게 주며 말했다.


"뉴요커들은 이렇게 입어. 이거 니가 가지고 가서 입어~"


언니가 내게 건네준 점퍼는 두 달 전 내가 "아름다운 가게"에 가서 만오천 원을 주고 산 점퍼였다. 병원에서 철마다 옷들을 분실하는 까닭에, 내가 옷값을 아껴볼 요량으로 선택한 궁여지책이었다. 골프웨어에서 출시되었던 그 점퍼는 제법 디자인도 기능도 우수해 보였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작은언니는 "뉴요커들이 입는 스타일"이라고 설명하며, 내게 좋은 옷을 하나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언니의 선물을 거절하지 못하고, 점퍼를 그 자리에서 입어보고는 슬며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작은언니는 내가 가지고 간 옷가방에서 패딩 조끼를 하나 꺼내 입었다.


언니들이 각자가 살고 있는 병동으로 들어가는 길에 잿빛 하늘에서 차가운 눈비가 흩날렸다. 자동차의 운전석 앞 유리창에서 와이퍼가 연신 좌우로 움직이, 내 눈가에도 뿌옇고 축축한 무언가 자꾸만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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