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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Feb 21. 2024

효자손

등이 가려웠다. 남들보다 팔이 조금 더 길다는 것이 이럴 때만큼은 유리하다. 하지만 그런 유리함도 세월과 함께 덩달아 상실되고 있는 것 같다. 오른팔 왼팔을 순서 가리지 않고 뒤에서 아래로 혹은 위로 접어보며 긁어보았지만 시원하게 긁히지가 않았다. 소파에 누워있던 남편에게 다가가 등을 내밀며 좀 긁어달라고 했다.


남편이 "늙어서 그런 거야. 물을 좀 많이 먹어."라고 말하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만,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분무기를 집어 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들어 올렸던 웃옷을 후다닥 아래로 내렸다. 그런 나를 보고 내 뒤통수 언저리에서 남편이 말을 이었다. "수분 부족이라 그런 거잖어. 등에 물을 살짝 뿌리면 되는 건데, 어랍쇼, 옷을 내리면 어떻게 해?"


스스로는 매우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남자라고 말하는 남편의 엉뚱한 행동들이 가끔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할 때가 있다. 마누라가 등이 가려워서 긁어달라고 할 때, 지구상의 남편들 가운데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겠다 하는 기발한 처방을 하는 남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티브이 속 화면을 무심히 응시하며 짐짓 점잖은 어투로 말했다. "아니 할머니한테 차가운 물을 뿌리면 어떻게 해요? 로션을 발라주든가 해야죠."


소파 앞 탁자 위에는 남편의 화장품 케이스가 펼쳐져 있었다. 남편이 세럼, 에센스 등이 담겨 있는 케이스 안에서 제일 덩치가 큰 화장품 하나를 집어 들어 손에 살짝 묻히고는 내 등에 발라주었다. 등 뒤에서부터 은은하게 좋은 향기가 풍겨왔다. 남편이 어디서 선물을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그 화장품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소량을 바른 듯한데도 어라, 금세 등의 가려움증이 사라진 것 같았다.


눈에 황반변성이 와서 교사직에서 물러난 친구가 3월 둘째 주에 파리에 가서 일주일 가량 머물다 오자고 연락이 왔다. 그 친구를 따라가면 고급스럽고 안락한 호텔과 음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은 분명했으나, 부모님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히 이 도시를 떠나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 제안을 수락하지 못했다.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실 때까지는 한시도 이 도시를 벗어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의 처지가 안타까웠는지, 남편이 평상시보다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장인장모님 앞으로 몇 년을 더 사실 수도 있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 여행도 한 번 못 간다는 게 말이 돼?" 물론 그건 관점에 따라 말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차라리 이 도시 안에 있는 것이 내겐 수월한 일이었다.


나는 이제 삶을 좀 쉽게 살고 싶어졌다. 불안장애를 겪고 있다는 건 어찌 보면 내 타고난 그릇에 비해 욕심을 부리며 살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고, 남 모르게 지은 죄가 많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나는 지금도 여전히 연말정산과 자동차보험에 민감하고 "수입 없는 노년"에 대비하기 위하여 또 다른 루트를 열어보고자 애를 쓰고 있다. '이것도 다 욕심인데~'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부단히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나의 삶은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이 불안을 굴리며, 삶이라는 거대한 공포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다.


며칠 뒤 필리핀 클락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작은 아들이 퇴근길에 여행 물품을 사들고 들어왔다. 골프 여행객들이 많아지자 청주 공항에서 클락으로 가는 직항 운항을 개설한 덕에, 골프채 한번 잡아보지 않은 이 도시의 청춘 남녀들에겐 클락이 손쉽게 갈 수 있는 해외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오래전 여행 때 쓰고 남았던 외화 봉투를 열어 보았다. 중국돈, 일본돈, 말레이시아돈, 유로 등이 나라별로 봉투에 담겨 있었는데, 그 봉투들 가운데서 달러 봉투를 꺼내 들었다. 1달러짜리뿐만 아니라 50달러짜리도 몇 장 보였지만, 나는 1달러짜리 열다섯 장만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아들이 퇴근하는 소리가 나자 소파에 누워있던 남편이 자세를 고쳐서 등을 펴고 앉은 채로,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화장품을 순서대로 골고루 바르고 있었다. 티브이에선 이집트 유물 도굴에 관한 세계사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나는 가보지 못한 이집트와 영국 대영박물관을 눈으로 좇았다. 남편이 발라준 화장품 성분이 좋은 것일까, 등은 더 이상 가렵지 않았다. 그래도 효자손 하나 미리 장만해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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