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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니 Mar 06. 2022

내가 살고 싶은 집

나를  언제나 행복하게  해주는 상상..


                          

머지않아 일을 접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질 그때쯤엔 비좁게 그어진 하얀 선 안에 힘들게 주차를 하고,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눌러 문이 열리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옆집과 똑같이 생긴 단단한 철문 앞에 서서 또 비밀번호를 몇 개씩 눌러야만 겨우 들어가지는 집이 아니라 산책을 하다 돌아와 신발에 묻은 흙을 탈탈 털고 성큼 들어설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


내가 살 집은 햇살이 머무는 시간이 긴 양지바른 곳에  건강한 나무와 싱싱한 풀들과 예쁘고 소박한 꽃들에 싸여 있다면 좋겠다. 집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발을 적시지 않고도 돌다리 몇 개로 건널 수 있고, 바닥의 돌멩이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손을 적실 수 있을 만큼 얕고 만만해 보이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으면 좋겠다.
여름엔 발을 담그고 개울가에 무심하게 앉아 있다가 심심해지면 발가락을 간질이는 물살을 거슬러 천천히 올라가 보거나 겨울엔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나와 흐르는 물 위로 내리자마자 녹아버리는 눈을 무심히 바라보거나 아주 추운 날에는 습자지 같은 살얼음을 머리에 이고도 씩씩하게 돌돌 거리며 흘러가는 기특한 물살을 따라가 보고 싶다.


내가 살 집의 겉모습은 멀리서 보면 집인지 나무인지 풀인지 꽃인지 분간이 가지 않게 가급적 드러나지 않고 작고 아담했으면 좋겠다. 잡지의 한 면을 장식하거나 TV에 등장하는 멋진 집들과는 거리가 멀수록 좋겠다. 흔하지 않은 멋진 고급스러운 자재로 장식을 하거나 날카로운 각, 독특한 선과  특이한 문양을 연출하는 것은 당연히 사양한다.


산등성이나 들판을 벌겋게 깎아 내서 땅 속에 철근을 깊게 박아 기둥을 세우고, 땅 위에 시멘트를 두껍게 바르고, 지붕을 높이 올려 집을 짓고 싶지 않다. 가능하다면 최소한의 나무나 풀만을 걷어내고 그 안에 눈에 뜨이지 않게 다소곳이 들어가 앉아있는 집이었으면 좋겠다. 산의 부드러운 능선이나, 들의 굽어진 곡선, 휘어진 풀들의 느낌을 따르면서, 가능한 꽃이나 풀이나 나무나 흙이 가진 색이나 선이나 모양을 크게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정말 조화롭게 자연처럼, 자연스럽게 지어진 집이었으면 한다. 산책을 하다 집에 들어섰을 때, 몸에 묻혀 들어온 나무 냄새, 흙먼지, 지푸라기가 어색하지 않은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수록  몸을 건사하는 것조차 힘이 들터이니, 청소하는데 하루 중 많은 시간이 허비되지 않으면서도 가능하다면 날마다 구석구석 손길이 닿을 수 있도록 아담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무심한 여백을 담아낼 수 있을 정도의 과하지 않으나 여유로운 공간 정도는 허용된 집이었으면 한다.


햇볕을 많이 오래도록 담아 둘 수 있도록 창문이 많았으면 좋겠다.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비나 바람이나 별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고개를 들어서 창을 내다볼 때, 꽃잎과 눈이 마주 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특별히 거실에는 커다란 창이 있었으면 좋겠다. 뜰 쪽을 향해 놓인 푹신한 소파에서 목련이 비에 촉촉이 젖는 것, 감나무 가지가 부러질 듯 바람에 휘청거리는 것, 노란 꽃창포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꽃을 진작에 떨구어 낸 작약 나무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 가는 것 같은 사랑스러운 모습들을 질리도록 실컷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상상만으로도 황홀해지는 그 장면이 아마 내겐 가장 큰 호사가 될 것 같다.

그럴듯한 2층이 아니라 높지 않은 계단을 편하게 올라가면 다락방처럼 아담한 침실과 서재가 있었으면 좋겠다. 서재는 넉넉한 크기의 앉은뱅이책상과 푹신한 등받이 의자를 놓을 수 있고, 지금 내가 가진 모든 책을 다 진열해 놓고 싶은 생각은 없으므로, 내가 아끼고 자주 펼쳐 보는 책들을 꽂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책장이 있고, 책을 보다 가끔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쉬고 싶을 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공간이면 좋겠다.

침실에도 꼭 창이 있었으면 좋겠다.

새들의 수다에 눈을 떠 눈부신 햇살의 간지럼 속에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수 있다면,
침대 머리맡에 베개를 몇 개 걸치고 비스듬히 앉아서 밤하늘에 흐르는 별을 세거나, 때로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인들이 찾아오기 쉽도록 혹은 가끔 먹거리를 사러 가거나 나들이를 가더라도 너무 힘들지 않게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끔 찾아주는 친구가 있어서, 같이 밥을 먹고 거실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며 이야기를 하다 집 밖으로 나와서 천천히 산책을 하며 함께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고 싶다.


누군가가 쓰던 물건은 주인의 수명을 따라 그 빛을 잃어 가는 것 같다. 가끔 TV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문고리 하나, 타일 하나에 신경을 쓰고 고급가구로 치장을 한 너무  멋스럽고 고급스러운 집을 본다.

그럴 때마다  저 안에서 저 사람들은 얼마나 누리며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순간이 될지도 모르고, 아마도 길어야 몇십 년 일 것이다.
살아 있을 적엔 편안하게 몸을 담겠지만, 죽은 후엔 누군가에 의해 적당히 뜯어고쳐지거나 허물어져 사라지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혹, 그렇게 될 때 힘들거나 아깝지 않도록, 단단하거나 고급스럽지 않은 가성비 좋은 집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아.. 여기까지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충분히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이번 생에서는 내가 원하는 집을 결코 가질 수 없겠지만, 뭐.. 괜찮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구중궁궐을 짓든지 오막살이 초가집을 짓든지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안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가 더 중요할 테니까.

어디에 살든지 마음만 평온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내가 살고 싶은 집이 아닐까..


이런 다소 비현실적인 상상을 해보는 건

그런 집을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런 집을 닮은 마음을 갖고 싶어서 일 것이다.

편안하고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이 생을 떠날 때, 내가 가진 것 그 어느 것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어느 순간부터는 점점 더 많이 비우고, 버리고, 간결 해지다가 결국 제로가 되어  빈손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나의 남은 생은  뒤에 남겨질 나와 함께 했던 모든 공간, 물건과 사람들에게  감사를 보내며

조용히 소멸로 나아가는 그런 쿨하고 담백한 황혼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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