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옳고 그름을 멈추고, 마음이 머물 자리 하나를 만들어주는 말
대화가 막힐 때,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다.
말 사이에 숨을 고를 여백이다.
여백이 없는 대화는 칼날처럼 서로를 겨냥하고
여백이 있는 대화는 물처럼 서로를 감싼다.
여백을 만드는 가장 부드러운 문장이 있다.
“그럴 수도 있겠네.”
이 문장은 단순해 보이지만
상대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힘을 가진다.
말을 멈추지 않고, 싸움을 자극하지 않고
상대의 세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판단이 멈추는 순간, 대화는 열린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방어를 내려놓는다.
인지과학자 로저 브라운은 인간의 언어 반응을
‘판단적 언어(judgmental language)’와 ‘여백 언어(space-opening language)’로 나눈다.
“아니야, 그건 아니지”는 판단의 언어다.
상대를 틀린 위치에 놓고
대화를 경쟁처럼 만든다.
반면 “그럴 수도 있겠네”는 여백의 언어다.
상대를 옳고 그름의 저울 위에 올리지 않고
감정의 입장을 그대로 존재하게 둔다.
그런 여백 속에서
상대는 자신의 말과 감정을 다시 돌아볼 여유를 얻는다. 여백은 말보다 먼저 마음을 느슨하게 한다.
이 문장이 강한 이유는 인정과 동행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겠네”는 동의가 아니다.
“너의 세계도 가능하다”는 존재의 인정이다.
이 말의 힘은 상대를
옆자리로 불러들이는 데 있다.
정면을 마주 보며 따지는 대화가 아니라
나란히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로 만든다.
이 문장은 대화의 방향을 바꾼다.
‘틀렸어’ → ‘가능해’
‘반박’ → ‘탐색’
‘방어’ → ‘여유’
이런 작은 전환이 관계의 흐름을 바꾼다.
여백은 상대에게 ‘생각할 기회’를 준다.
심리학자 티모시 윌슨은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설명할 때
감정의 강도가 현저히 줄어든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는
상대가 스스로 설명할 공간을 열어준다.
“왜 그렇게 느꼈어?”
“그 상황에서 너라면 그럴 수 있겠다.”
이 문장은 관계를 ‘논쟁의 장’에서
‘탐색의 장’으로 이동시킨다.
여백은 상대의 마음을 보호하고
관계의 균열을 최소화한다.
여백을 주는 말은 성숙한 사람의 언어다.
여백을 준다는 것은
내 입장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놓아줄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성숙은 말의 힘이 아니라
말을 덜어내는 힘에서 나타난다.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관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는다.
그는 대화의 중심에 ‘정답’이 아니라
‘관계’를 놓는다.
이 문장이 주는 마지막 효과는 마음의 온도를 높인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정답을 원하기보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온도를 원한다.
“그럴 수도 있겠네.”
이 말이 주는 온도는 바로 그런 온도다.
이 온도는 상대를 바꾸지 않지만
상대의 마음을 안전하게 만든다.
그리고 안전한 마음에서만
대화는 깊어지고
관계는 다시 잇는다.
“그럴 수도 있겠네”는 설득의 언어가 아니라 여백의 언어다. 대화의 온도를 낮추고 관계의 가능성을 넓히는 가장 부드러운 문장이다.
여백은 자체로 사랑의 한 방식이다.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