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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라맘 끌레어 Sep 20. 2022

가출한 모녀가 예쁘다고요?

런던에서 집 구하기

영국행이 결정되니 지인들이 조언을 해준다.

“작년에 런던 친구 집에 갔거든. 얼마나 추웠는지 잊을 수가 없어.”

“아니, 얼마나 추웠길래요?”

“창문이 방충망도 아니고 바람이 슝슝 들어와. 장식용 아닌가 할 정도로 실내나 실외나 온도 차이가 별로 없더라니까. 집에서는 이불도 안 덮고 자는데 거기서는 얼굴만 빼고 꽁꽁 싸매고 잤어. 이불속에 있지만 얼굴은 실외 취침하는 기분 어떤지 감이 와?.”


집안에서 신을 털 크록스, 한의원에서 주로 사용하는 돌뜸, 전자파가 안 나온다는 전기요, 그리고 따뜻한 잠옷 여러 벌 등 방한용품을 한국에서 철저하게 준비해 갔다. 그리고 런던 집을 구할 때도 창문이 장식용이나 다름없다는 빅토리아 스타일 하우스보다 한국사람들이 선호하는 플랫(Flat, 아파트의 개념)을 찾았다. 하우스 투어 할 때도 창문을 꼼꼼히 체크하며.


살다 보니 왜 같은 브랜드 같은 홍차를 한국보다 영국에서 마셔야 맛있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눈뜨자마자 진한 하얀 입김이 나오는 차가운 온도에서 호호 불어가면서 마시다 보니까. 그에 반해 따뜻한 한국 집에서는 얼. 죽. 아(얼어 죽어도 아이스)가 맛있을 뿐 티는 가끔 마시게 된다.


(한국 마인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온돌공사를 했는데 집에서 하얀 입김이 나와?’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첫째, 난방비가 비싸다. 그러므로 한국처럼 따뜻하게 산다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생각이었다.

둘째, 이중창이더라도 한국 집만큼 바람이 차단되지 않는다.

셋째, 한국 아파트에서는 모두 난방을 하니까 단열효과가 높지만 런던에서는 오로지 우리 집뿐, 그러니 아무리 세게 틀어도 한국만큼 따뜻하지 않다. (단독주택이 아파트보다 대체로 춥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하는데 보탬이 된다.)

넷째, (주관적이지만) 영혼 없이 공사를 한다. 훨씬 추운 북유럽 실내도 영국보다 따뜻하다.

다섯째, 영국인들은 추위에 강하다. 노르웨이 고래 투어 갔을 때도 추위에 제일 강한 사람은 북유럽 사람들도 아니요, 영국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진심으로 공감했다.


+다시 런던에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차피 추울 플랫보다 영국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빅토리아 스타일 집을 구할 것이다.




발품 파는 만큼 좋은 물건을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많은 물건들을 보았다. (가기 전에 런던살이와 관련된 책도 부지런히 예습하고 갔기에 어느 정도 윤곽을 잡고 갔다.) 동네는 NW(북서쪽), 그중에서도 햄스테드 쪽을 생각하고 갔으나 살아본 결과 아침 등하교 시간이 너무 붐비고 다닥다닥 불은 느낌이 숨 막히게 느껴졌다. 그것보다는 런던을 상징한다는 공원, 그중에서도 런던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는 프림로즈 힐이 바로 보이는 집이 우리 마음에 들어왔다.


학교평가 레벨에서도 가장 높은 레벨(아웃스탠딩)을 받은 학교에 배정받을 수 있고, 플랫(아파트)에 창문은 이중창, 택배를 받아주는 포터(관리인)도 있고, 유모차에 자고 있는 엘라가 깨지 않고 집안으로 한 번에 들어갈 수 있게 계단도 없다. (대부분은 4-5칸의 계단이 있다.) 그리고 심지어 바닥은 카펫이 아닌 온돌공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고심해서 고른 집, 바닥공사 때문에 이사 날짜도 미뤄졌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기다리면 이제는 아무 문제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시점이었다. 학교도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고,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인터넷 설치기사가 온다고 해서 하루 종일 외출하지 않고 기다렸는데 펑크를 내도, 온수 물탱크가 고장 나서 빨래도 못 돌리고 샤워를 못해도, 바닥 온돌이 잘 안 되더라도 괜찮았다. 웰텀 투 런던이니까.


그런데 그런 날이 잦아지기 시작한다. 집에 문제가 생겨 수리공을 부르면 약속시간은 왜 정했나 싶고, 분명히 집 안에 들어와서 작업할 때 신발을 벗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흙 묻은 신발로 도둑이 들어온 것처럼 사방에 흙이 떨어져 있다. 멀쩡한 벽이 부서져 있기도 하고. 그럼 그것을 또 수리해야 하고, 또 그날은 대청소를…

참고 또 참았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아지니 서로가 서로에게 예민해지는 시점이 왔다. 싸움의 원인은 ‘내가 1.2-1.5 하는데 왜 너는 1밖에 안 하는 거야?’로 시작. (부부가 잘 사는 법은 내가 상대방보다 2는 해야지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상대에게 날을 세우다 결국 마음에도 없는 말을 상처주듯 마구 던진다. 철저하게 무너져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자존감이 바닥을 기고 있는 듯한 느낌. ‘여긴 어디? 나는 왜 런던에 있는 걸까?’로 시작해 한국행 비행기를 알아보는데 신랑이 핸드폰을 뺏어서 던진다. 그제야 그 공간에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가출하듯 카페로 도망친 모녀. 밖으로 나와서야 '아이 앞에서는 싸우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며...

혹시나 상처받았을지도 모를 엘라에게 온갖 웃음을 안겨주었다. 속으로는 한국에 있는 친정엄마가 생각나 아이처럼 울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어른인 척했다. 그런데 낯선 사람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건다.

눈물을 애써 감추고 개그우먼인 양 몸개그를 하고 있는 나, 웃기다며 그걸 따라 하던 어린 엘라.



너희 둘이 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사진 찍어줄까?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막장드라마의 한 순간이었다.

도망치듯 나오느라 잠옷바람으로 가출하듯 뛰쳐나왔는데, 그 누군가에게는 가출 모녀가 아닌 아름다운 순간 일 수도 있다는 것을...


‘너의 상처를 별로 만들라(Scars into stars)’는 영국 격언이 있다. 상처(Scar)와 별(Star)은 스펠링 한 끗 차이.


상처 입은 조개만이 반짝이는 진주를 품을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상처 없이는 진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타국살이로 받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있는 나에게 낯선이가 빛나는 진주의 순간으로 전환시켜주었다.


+ 오늘도 육아가 힘들었을 과거의 나 혹은 당신에게. 우리는 따뜻한 온기의 웃음 추억을 켜켜이 쌓는 중입니다. 아이의 유년 추억은 상처와 실패의 경험에서도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주겠지요. 그러니 한 번뿐인 유년시절 그리고 엄마가 된 우리의 나날들이 하찮을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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