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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정 Oct 20. 2021

이방인의 삶: 외계인이 본다면 우리는 모두 지구인

“파리에 인종차별이 많아요?”


 이방인이란 뭘까.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을 일컫는다.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이방인이다. 이방인으로 살다 보면 여러 불편하다. 우선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뿐만 아니라 요리가 생소하고 기본예절이나 문화가 다르다. 오랜 시간 살아도 적응이 안 되는 부분은 끝까지 남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새로운 삶의 형태에 적응한다.


 프랑스인은 친한 친구 사이에 인사로 볼에 뽀뽀(Bisous)를 한다. 그러한 인사법을 비주라고 부른다. 친구가 여러 명 만나면 줄을 서서 한 명씩 비주를 하는데, 처음에는 내 차례가 오기까지 매우 긴장했다. 어떻게 하면 어색하지 않게 잘할 수 있을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기도 했다. 그토록 어색했던 비주도, 요즘은 보드라운 피부이나 거칠거칠한 수염 같이 참 다양한 질감의 볼이 있다는 걸 실감할 정도로 익숙하다. 볼뽀뽀를 할 때마다 점차 이완되는 내 어깨 근육이 프랑스 문화에 적응되는지 가늠하는 척도처럼 느껴졌다. 코로나 이 후로는 비주를 많이 생략하는 추세지만 그전까지는 비주를 하지 않으면 인사를 제대로 안 마친 기분이 들어 찜찜하기도 했다.


 만약 내가 프랑스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프랑스인처럼 행동을 한다면 이방인이 아닐까. 그렇게 될 리도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방인이라는 정의에 따르면 나는 영원히 이방인일 것이다.


 어느 날, 인도인 친구와 저녁식사를 했다. 대화를 나누다가 Foreigner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날 내가 끓인 김치찌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김치찌개가 외국인에게는 꽤나 매울 수 있겠다고 말하려 했다. 내게는 전혀 맵지 않았던 닭갈비나 제육볶음이 함께 먹은 다른 나라 친구에겐 엄청 매웠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foreigner라는 단어를 듣고는, “노오오오오!”라고 과장된 음조로 팔을 휘휘 저으며 소리쳤다. 장난 반 진심 반 섞인 말투로 그는 그 단어가 자신을 움츠러들게 한다고 말했다. 파리에 살면서 스스로가 파리에 잘 섞이지 못했고 거기서 오는 자격지심이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더욱 강하게 온다고 장난스럽게 슬퍼했다. 나는 외국인이라는 의미로 말했는데 그에겐 이방인으로 느껴졌고 그 단어가 주는 울림이 그를 불편하게 했다.


 그는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인도인 어머니는 스리랑카인, 청소년기는 미국식 국제학교에서 성인이 된 후에는 영국 대학교를 나와서 스리랑카에서 일을 하다가 프랑스에 왔다. 아버지는 힌두교, 어머니는 이슬람, 누나는 자이나교 스스로는 무교인 성장 배경 속에서 스스로를 늘 이방인으로 생각하며 살아서 그 단어가 소외감을 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 다른 주제로 대화가 넘어갔다.


 모두가 떠나고 침대에 누워 그가 한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외국인과 이방인은 무엇이 다를까. 외국인은 말 그대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을 뜻하는 가치중립적인 단어이고 이방인은 하나의 문화에 아직 미숙한 이를 뜻하는 가치판단이 들어간 단어다. 나는 전자를 의도했지만 그가 후자로 받아들였다면 기분이 상했을 것 같다. 비록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이방인이라는 표현으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큰 충격이었다.




 해외에 살아가며 가끔 인종차별을 당한다.


 프랑스에 도착한 이튿날, 한 남자가 성난 고릴라처럼 어깨를 부풀리곤, 팔을 90도로 꺾은 채 내게 걸어오며 “곤니치와! 곤니치와! 곤니치와!”라고 소리쳤다. 잔뜩 흥분해 만화 속 캐릭터처럼 콧김이라도 나올 기세였다. 덩치도 나보다 훨씬 컸고 주위에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다. 두려웠다.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 사람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로 빠르게 걸어갔다.


 코로나 이후로 마르세유에 갔을 때에는 호텔 앞 길바닥에 앉아 있던 여자가 나에게 “코로나,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어이없었다. 내가 도대체 왜 코로나이며, 그 여자는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이런 일들을 당하면 심장이 쿵쾅거린다. 그 순간에는 자리를 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자리를 뜨지만 어두운 밤에 혼자 남아 생각에 잠기면 그때 뭐라고 했어야 더 좋았을까 고민한다.


 대체 그들은 왜 타인에게 그런 말을 해야만 했는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 때문에 자신들이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불운한 자신의 인생에 대해 화풀이를 할 비교적 약체인 사람을 찾는 걸까, 아니면 내가 그들에게 뭔가를 잘못한 걸까. 피해자에게 이런 불편한 마음을 들게 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원했던 바라고 생각하면 그저 무시해버리는 게 최고겠지만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파리에서는 종종 상점가나 번화가에서 니하오, 곤니치와 하고 말을 거는 사람이 있다. 내가 동아시아인처럼 생겼으니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가 아는 동아시아 쪽 언어를 사용하며 친근하게 보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 찾아오는 외국인이라고는 미국인 밖에 없던 시절 모든 외국인에게 헬로우라고 인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 행동이 인종차별인지 아니면 내가 신기한 마음으로 언어를 사용한 사람을 이해 못하는 마음 좁은 사람인지 확신이 안 선다. 머리가 아프다.




 “파리에 인종차별이 많아요?”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를 통해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 인종차별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횟수가 달라지고, 인종차별의 범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 답하기 곤란할 때가 많다. 누군가에겐 곤니치와 니하오라고 인사하는 것도 인종차별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길 가는 프랑스인 할머니가 어깨를 치고 가는 것부터가 인종차별일 것이며 누군가에겐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부터가 인종차별일 것일 테니까. 그렇다고 이러한 답변을 모든 질문자에게 한다면 말이 너무 길고 복잡해지겠지.


 인종차별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처럼.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면 어제일지도, 모르겠다.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뫼르소는 정당방위에 가까운 살인행위를 저지르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된다. 위에 인용한 문장은 뫼르소가 신을 믿지 않고 반사회적 인물이라는 증거로 사용된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으니 감정이 없는 살인마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뫼르소가 살던 세계에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에 정답이 있었고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일종의 이방인이었다. 강하게 이야기하자면, 뫼르소는 다르기 때문에 죽었다.


 다름에 대한 혐오 혹은 두려움이 이방인에 대한 경계로 이어진다.


 우리와 다른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길고 복잡하다. 우리가 익숙한 문화와 언어, 삶의 배경과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와 전혀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문화에서 비롯된 편견과 싸워야 하고 생소한 분야에 대해 엄청난 양의 학습이 필요하다.


 그보다 편한 방법이 있다. 다른 존재를 혐오하고 두려워하며 그들이 틀렸다고 비난하는 것.


 세계 도처에서 쉬운 방법이 자행된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다른 문화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냉전 아래서 서로를 말살하려 노력했고 가톨릭과 이슬람이 싸워 온 역사는 벌써 1,000년이 넘는다.


 인류가 이러한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 서로를 향한 혐오와 멸시를 이겨내고 보다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소식을 보고 있으면 그런 시대는 요원하다.


 방법이 없지는 않다. 가장 쉬워 보이면서 실제로는 가장 어려운 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길고 복잡한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는 외계인이 보기엔 모두 같은 지구인이다. 뭐가 그리 다르다고 불가능하겠는가. 한 개인이라도 새로운 문화, 새로운 개념, 새로운 지식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쌓이면 하나의 집단으로 이어지고 끝내는 지구인 모두가 서로를 이해할 단계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소망한다.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 열심히 싸우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을 우리는 아무리 다를지라도 같은 지구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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