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시장 막쉐 Marché
모든 걸 뒤로 하고 깊은 숲 속 나 혼자만 아는 장소로 도망치고 싶은 날이 가끔 있다. 쓰고 있던 소설은 어느 순간 커다란 바위에라도 막힌 듯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보내야 할 원고 기일이 다가오는데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고,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하고, 싱크대에는 설거지가 잔뜩 쌓여 있다. 전날부터 아프기 시작한 아랫배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 지끈거린다. 힘든 일을 만드는 공장은 일감을 몰아서 만드는 모양이다.
이토록 귀찮은 날에는 침대에만 누워 뒹굴거리며 넷플릭스를 보다가 자고 다시 보다가 자고 하고 싶지만 그러면 내 할 일은 누가 해주리오. 결국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마음을 다잡기 위한 나만의 방법은 단순하다. 식료품을 사러 나가기.
싱싱한 채소와 반짝이는 과일, 두툼한 고기 덩어리, 평생 먹어도 못 먹을 것처럼 보이는 과자 더미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재료를 보고 있으면 어떤 요리를 만들지 두뇌가 핑핑 돌아간다. 대파를 손질하고 마늘을 다지고 버섯을 잔뜩 넣고 휘리릭 만든 양념으로 버무린 소고기와 마른 생선으로 우려낸 육수를 붓고 간장과 소금으로 맛을 내면 되려나, 시원한 맥주 한 잔도 곁들여야지!라는 식으로. 이렇게 요리 순서를 세우다 보면 어느새 실제 해야 하는 일도 순서가 잡힌다. 스트레스도 풀고 맛있는 요리도 먹고 일석이조다.
유치원에 다니던 때일까, 엄마 손을 잡고 모란 시장에 갔던 기억이 난다. 집과 그리 멀지 않았던 것 같지만 차를 타고 갔다.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시장에 가면 먹을 것들을 상상하며 설레던 어린 시절의 나는 먹을 것들에 위안받는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알록달록한 우산 아래 자리 잡은 할머니들은 여러 가지를 팔고 계셨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갑오징어가 가득한 대야를 보고 만화 영화 속 악당처럼 내게 먹물을 쏟아 낼까 두려워 도망치기도 했다. 도망치다가 마주친 인절미를 닮은 조그만 강아지들. 집에서 키우고 싶다고 엄마를 조르기도 했다. 결국은 그날은 강아지 대신 잘 구운 밤을 한 아름 안고 집에 돌아갔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강아지들의 올망졸망한 눈동자가 떠오른다. 부디 행복하게 살았기를.
파리에서도 까르푸나 모노프리, 거리 곳곳에 있는 식료품점들, 봉막쉐 식품관 그리고 지정된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인 막쉐(Marché)에 놀러 가는 일은 내 주된 취미 생활 중 하나다.
동네 정육점에 가면 별의별 고기가 다 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는 물론 거위 간이나 직접 만든 소시지까지. 요리법을 모르는 고기는 주인아저씨에게 물어보면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해주신다. 버터와 소금을 뿌린 간단한 스테이크나 프랑스식 갈비찜 같은 과정이 제법 복잡한 뵈프 부르기뇽을 만드는 법에 대해서 듣고 있으면 옛날이야기라도 듣는 것처럼 재미있다.
자주 가는 곳들은 내 얼굴을 기억해준다. 인사를 하고 눈을 맞추고 웃음을 교환하는 건 단순하지만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럴수록 이 동네에 적응 하고 있다는 실감이 든다. 처음에는 빵 하나 사는 것도 걱정되고 부담감에 긴장했는데, 많이 컸구나 하고 스스로를 칭찬해야지.
과일가게에서는 얼마 전에는 자두를 한 봉지 샀더니 맛보라고 무화과도 몇 개 넣어주었다. 먹어 보니 맛있어 그걸로 한 봉지 더 사 와서 무화과 타르트를 만들었다. 와인가게에선 내가 자주 사는 와인을 기억하고 비슷한 종류를 추천해 준다. 오늘 준비할 요리에 대해 말하면 어울리는 와인을 말해준다. 외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정情. 언어로 표현하지는 못해도 그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집 근처 하스파이Raspail 대로에는 화/금/일 일주일에 세 번 정기 시장이 열린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 작지도 않다. 아침 일찍 열어 이른 오후에 닫는다. 시장은 생명력이 가득하다. 늘 걷던 거리인데도 시장이 들어서면 다른 곳처럼 보인다.
큼지막한 텐트 아래서 자신이 가져온 물건 파는 상인들은 각양각색이다. 치즈, 올리브, 버섯, 고기, 채소와 과일들. 다양한 색과 향이 섞여 눈과 코를 자극한다. 사골 국을 끓여도 좋을 커다란 냄비와 지글지글 익어가는 전기 구이 통닭, 조그마한 동물 인형들 앞에 모여 앉은 어린아이들.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장의 문법 아래서 나는 새로운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한다. 그 감각은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나를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구경하던 시장으로 데려간다. 꽃무늬 스카프 원단을 살피며 대화하는 프랑스 할머니들은 내가 광장시장에서 본 꽃무늬 누빔 조끼를 고르던 한국 할머니들과 닮아 있다. 자연스레 지어지는 미소.
푸른색 머리가 그대로 달린 청둥오리나 곰팡이가 잔뜩 낀 블루치즈, 반으로 접힌 우설을 보면 으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 요리로 나오면 맛있게 먹기는 할 테지만, 실제로 보면 놀라고 만다.
이탈리아 청년이 파는 반찬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시칠리아 산 올리브 한 줌과 올리브 유와 식초로 맛을 낸 문어숙회 한 팩을 샀다. 청년은 말린 모렐 버섯이 품질이 아주 좋다며 냄새를 맡아보라고 권한다. 부드러운 흙냄새와 산뜻한 버섯 향이 향기롭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청년이 한 시간 물에 불리고 리조또를 만들어 먹으라고 강력 추천한다.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리조또를 먹지 않으면 삶이 한 꺼풀 슬퍼질 것 같지만 이미 올리브와 문어와 연어 한 토막과 살구 한 봉지를 샀기에 유혹을 이겨냈다.
집에 오는 길에 사 온 바게트와 문어숙회, 올리브를 먹으니 힘이 난다. 오후 내내 소설을 쓰고 요리 사진을 찍고 원고를 작성한다. 머리가 지끈 거리기 시작할 때 고무장갑을 끼고 너바나 음악을 크게 켜고 설거지를 후다닥 해치운다. 그릇과 컵을 뽀드득 닦으면 머리도 차차 가라앉는다. 다시 앉아서 글을 쓴다. 휘휘 잘 풀려나가는 이야기. 저녁에는 버섯전골을 먹어볼까나. 맥주 한 잔을 곁들여서.